겉다’는 걷다가 아니다
전북 방언이 말하는 추측의 언어와 세대 간 소통의 단절
식탁 위의 침묵과 소통의 단절, 겉다라는 낯선 단어가 불러온 세대 갈등의 현주
명절이나 제사가 되어 온 가족이 모인 자리,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침묵은 이제 한국 사회의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단순히 관심사가 다르거나 스마트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침묵의 기저에는 언어의 장벽, 특히 방언의 소멸로 인한 의미 전달의 실패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전라북도, 그중에서도 전주와 익산, 군산을 아우르는 전북 북부 지역의 노년층 화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겉다라는 표현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비가 올 거 겉다라거나, 그 사람이 참 좋은 거 겉다와 같은 문장이 그 예다. 표준어 화자나 젊은 세대가 듣기에 이 말은 걷다(Walk)의 오발음이거나, 겉(Surface)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전북 방언에서 겉다는 표준어의 같다(Same/Like)에 해당하는 어휘로, 추측이나 불확실한 판단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문법 요소다.
문제는 이 단어가 단순히 모음 하나가 바뀐 사투리 차원을 넘어, 젊은 세대에게는 전혀 해독되지 않는 암호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10대나 20대에게 겉다는 걷다의 변형이거나, 문맥상 전혀 알 수 없는 소음으로 처리된다. 할머니가 날이 추울 거 겉은디라고 말했을 때, 손자는 걷다니요? 어디를요?라고 반문하거나, 아예 못 들은 척 넘겨버린다. 이러한 사소한 오해들이 쌓여 세대 간의 소통을 가로막고, 정서적 유대감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겉다를 둘러싼 이러한 불통의 현상은 급격한 표준어화와 도시화 속에서 지역 방언이 어떻게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본고는 전북 방언 겉다의 어원과 음운론적 변천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왜 하필 전북 지역에서 같다가 겉다로 변화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추측과 양태(Modality)의 문법적 기능을 분석함으로써, 전북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들여다볼 것이다. 나아가 젊은 세대가 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을 사회언어학적 관점과 인지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사라져가는 방언을 기록하고 이해하는 것이 왜 단순한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의 소통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인지를 역설하고자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겉다라는 허름한 집 속에는 전북 사람들의 오랜 삶과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a)에서 어(eo)로의 모음 상승과 전북 방언의 음운 체계
전북 방언에서 같다가 겉다로 실현되는 현상은 우연한 발음 실수가 아니라, 전라도 방언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체계적인 음운 규칙의 결과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어의 모음 체계와 변천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 국어 시기부터 같다(如, 同)는 비교와 유사성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쓰였으며, 이것이 문법화되어 추측을 나타내는 보조 형용사로 기능하게 되었다. 표준어에서는 양성 모음 아(a)가 유지되었지만,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이 아가 음성 모음 어(eo)로 바뀌는 독특한 현상이 발생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이는 후설 저모음 [a]가 중모음 [eo]로 상승하거나, 혹은 양성 모음이 음성 모음화되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 방언, 특히 전북 방언은 모음의 높낮이와 전후 위치에 있어 표준어와 다른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학교를 핵교라고 하거나, 고기를 괴기라고 하는 전설모음화 현상과 더불어, 아 모음이 어로 바뀌는 현상은 전북 방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파리를 파리라고 하지 않고 퍼리라고 하거나, 팔을 펄이라고 발음하는 노년층 화자들의 발화에서 이러한 경향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겉다 역시 이러한 음운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왜 전북 사람들은 아를 어로 바꾸어 발음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발음의 경제성 원리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입을 크게 벌려야 하는 저모음 아보다, 입을 조금 덜 벌리고 편안하게 발음할 수 있는 중모음 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굳어진 것이다. 또한, 전북 지역이 충청도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충청도 방언 역시 모음의 음성 모음화 경향이 강한데(예: 야 -> 여), 이러한 인접 방언의 영향이 전북 북부 지역의 겉다 형성에 기여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겉다가 단순한 단어의 변형이 아니라, 문장 전체의 억양과 결합하여 전북 특유의 운율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럴 거 겉다잉~이라고 말끝을 길게 늘이며 발음할 때, 겉다의 어 모음은 문장의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화자의 확신 없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청각적으로 구현해 낸다. 표준어 같다의 맑고 가벼운 느낌에 비해, 겉다는 묵직하고 탁한 느낌을 주어, 전북 사람들의 신중하고도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기질을 대변하는 듯하다. 따라서 젊은 세대가 겉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차적인 원인은 이러한 음운 규칙의 차이, 즉 모음 하나가 바뀌었을 때 단어 전체의 형태(Gestalt)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지적 불일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한 추측을 넘어선 완곡함과 배려의 화법
겉다는 품사적으로 형용사에 속하지만,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보조 용언으로서의 기능이 훨씬 더 중요하다. 표준어의 -ㄹ 것 같다에 해당하는 -ㄹ 거 겉다는 전북 방언 화자들의 대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그런데 이 겉다가 수행하는 의미론적 기능은 표준어의 같다와 미묘하게 다르다. 표준어의 같다가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관찰자적 추측(It seems like)에 가깝다면, 전북 방언의 겉다는 화자의 주관적인 느낌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섞인 관계 지향적 추측(I feel like / It might be better if)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음식을 권할 때 표준어 화자는 "이거 맛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는 음식의 맛에 대한 정보 전달이다. 그러나 전북 화자가 "이거 맛날 거 겉은디 좀 먹어보랑께"라고 말할 때의 겉다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맛있으니 너도 먹어보면 좋겠다"는 권유와, "혹시 맛이 없더라도 내 성의를 봐서 이해해 달라"는 완곡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겉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화자는 자신의 주장을 단정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판단의 여지를 청자에게 넘겨주는 공손성 전략(Politeness Strategy)을 구사하는 것이다.
특히 전북 방언에서 겉다는 문장 끝에 쓰일 때 겉다, 겉냐, 겉지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이때 결합하는 어미에 따라 뉘앙스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비 올 거 겉냐?"라고 물으면 단순한 질문이지만, "비 올 거 겉은디..."라고 말끝을 흐리면 "우산을 챙겨라" 혹은 "빨래를 걷어야겠다"는 함축적 의미(Implicature)를 전달한다. 젊은 세대가 겉다를 이해하기 힘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 고맥락(High Context)적 특성 때문이다. 직설적이고 명확한 화법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겉다 속에 숨겨진 이중, 삼중의 의미 층위는 해독하기 어려운 난해한 코드일 뿐이다. 그들은 겉다를 들었을 때 겉(Exterior)이라는 명사적 의미를 먼저 떠올리거나, 걷다(Walk)라는 동사적 의미와 혼동하여 문맥을 놓치게 된다.
또한 겉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쓰인다. "나 좀 아픈 거 겉어"라고 말할 때, 이는 실제로 아프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상대방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혹은 엄살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전북 사람 특유의 점잔 빼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 같다라고 한 발짝 물러서서 표현함으로써 타인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겉다는 단순한 문법 형태소가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갈등을 피하려는 전북 지역의 사회적 성격이 언어화된 결과물이다.
표준어 중심 교육과 미디어 환경, 그리고 인지적 거리감
그렇다면 왜 유독 젊은 세대는 겉다라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는 강력한 표준어 중심의 공교육과 미디어 환경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표준어 보급을 근대화와 동일시하며 강력하게 추진해 왔다. 학교에서는 사투리를 쓰면 교정의 대상이 되었고, 방송에서는 표준어를 쓰는 사람만이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 묘사되었다. 전북의 젊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TV와 인터넷을 통해 서울말을 모국어처럼 습득했다. 그들에게 할머니의 겉다는 교과서에 없는 틀린 말 혹은 못 배운 사람들의 언어라는 무의식적 편견이 각인되어 있을 수 있다.
둘째는 핵가족화로 인한 조손 가정의 언어 전승 단절이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자연스럽게 고어와 방언을 습득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의 핵가족 시스템에서 아이들은 부모, 혹은 학원 선생님과 주로 대화한다. 명절 때나 가끔 만나는 조부모의 언어는 아이들에게 외국어처럼 낯설게 들릴 수밖에 없다. 겉다라는 단어를 문맥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힐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언어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인데, 습득의 환경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셋째는 텍스트 중심의 디지털 소통 문화다. 젊은 세대는 음성 통화보다 카카오톡이나 SNS와 같은 텍스트 소통을 선호한다. 텍스트에서는 방언의 억양이나 장단이 소거되고, 맞춤법에 맞는 표준어 표기가 권장된다. 겉다를 문자로 쓰면 겉 다가 되어 겉(Surface) 모두라는 뜻으로 오독되거나, 오타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소리로는 구분이 가더라도 글자로는 낯선 이 단어는 디지털 공간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따라서 젊은 세대의 언어 데이터베이스에 겉다는 저장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걷다(Walk)와의 동음이의어(Homonym) 현상이 주는 인지적 혼란이다. 표준어 화자에게 걷다는 매우 기초적이고 빈번하게 쓰이는 동사다. 반면 방언 겉다는 그 형태가 걷다와 발음상 유사하거나(전북 방언에서는 걷다도 걷다로 발음되지만, 문맥상 구분이 필요하다), 혹은 겉(Surface)과 혼동된다. 젊은 세대의 뇌는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가장 빈번하고 익숙한 의미인 Walk나 Surface로 이 소리를 처리하려 든다. 문맥상 추측의 의미가 들어갈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뇌가 자동적으로 익숙한 단어로 매핑해 버리기 때문에 인지적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비 올 거 겉다"라고 하면, 손자의 뇌는 "비가 오는데 걷는다?"라고 잘못 해석하고 오류 메시지를 띄우는 셈이다. 실제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추석 무렵 외할머니 댁에 모였던 어느 날 저녁, 하늘이 흐려지자 할머니는 “비 올 거 겉은디, 빨래 걷어야쓸 거 아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가 오는데 걷는다니? 산책이라도 하자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고 넘겼다. 결국 아무도 빨래를 걷지 않았고, 다음 날 젖어버린 이불을 보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겉다는 같다는 뜻이야”라고 설명해 주셨고, 그제야 모든 상황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단어 하나를 몰라서 생긴 작은 오해가, 사실은 세대 간 언어와 문화가 단절된 큰 균열의 징후였다는 것을. 겉다는 단어는 들렸지만, 그 의미는 내 사고 체계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비단 어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삶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를 넘어선 공감으로, 겉다의 복권과 세대 통합의 언어학
지금까지 전북 방언 겉다의 어원과 문법, 그리고 세대 간 불통의 원인을 살펴보았다. 겉다는 낡고 틀린 말이 아니라, 같다라는 어휘가 전북의 토양 위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하여 정착한, 추측과 배려의 미학을 담은 훌륭한 우리말이다. 이 단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휘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전북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대하던 그들만의 부드러운 방식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세대가 겉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대 간의 소통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게을리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언어의 단절은 곧 마음의 단절이다. 할머니의 말을 손자가 알아듣지 못할 때, 두 사람 사이의 정서적 끈은 헐거워진다. 우리는 겉다를 다시 통역해야 한다. 억지로 젊은이들에게 사투리를 쓰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왜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제공해야 한다. 학교 교육에서 지역 방언의 가치를 가르치고, 미디어에서 희화화되지 않은 진짜 방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할머니 말은 사투리니까 배우지 마"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할머니 말에는 이런 깊은 뜻이 있단다"라고 설명해 주는 통역사가 되어야 한다.
겉다라는 말 속에는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겸손함과, 나의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 민주적인 태도가 녹아 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직설적인 화법이 미덕이 된 현대 사회에서, 겉다와 같은 완곡한 추측의 언어는 오히려 갈등을 줄이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가 될 수 있다. 비 올 거 겉다라는 할머니의 말에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씀이시군요, 우산 챙길게요"라고 화답하는 손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를 알아듣는 것을 넘어, 한 세대의 삶과 역사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화해의 몸짓일 것이다. 전북 방언 겉다는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려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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