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가 놓친 감정의 미세 결을 되살리는 방언 어휘 ‘사근사근하다’를 중심으로, 촉각적 언어의 어원·의미·문화적 맥락을 인류학적으로 탐색하고, 감정의 해상도를 회복하는 언어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표준어의 평면성을 넘어서는 방언의 입체적 감각과 정서의 해상도
우리는 흔히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 정의하며, 이를 공식적인 소통의 도구이자 가장 세련된 언어 형태로 인식하도록 교육받아왔다. 표준어는 행정적 효율성과 정보 전달의 명확성을 위해 감정의 굴곡을 다림질하고 의미의 중의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와 같은 매우 범용적이고 추상적인 어휘들로 우리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퉁치는 언어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디지털 신호처럼 0과 1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향한 호감은 단순히 좋다는 말 한마디로 포착될 수 없는, 찰나의 눈빛과 목소리의 톤, 그리고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의 질감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유기적인 상태다. 이러한 표준어의 평면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감정의 미세한 결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촉각적으로 묘사해 내는 언어가 바로 방언이다. 그중에서도 사근사근하다, 곰살맞다, 살갑다와 같은 방언의 형용사들은 단순히 대상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을 넘어, 화자가 대상을 오감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감각적 체험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사근사근하네라는 표현은 단순히 성격이 좋다라는 표준어적 해석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독특한 미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사람의 성격을 과일이나 음식의 씹는 맛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청각과 촉각, 미각이 공감각적으로 어우러진 고도의 은유다. 이 말이 발화되는 순간, 듣는 이는 상대방의 성격이 딱딱하거나 거칠지 않고, 적당한 물기와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어 대하기 편안하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본고는 표준어의 추상성에 대비되는 방언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표현력, 특히 사근사근하다를 중심으로 한 감정 형용사들의 어원과 의미망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방언 어휘들이 현대 사회에서 점차 소실되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감정의 단순화 현상, 즉 감정의 해상도가 낮아지는 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진단해 볼 것이다. 이것은 사라져가는 사투리에 대한 향수를 넘어,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의 제국을 언어를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이자, 인간 관계의 질감을 회복하려는 철학적 탐구다.
사근사근하다의 촉각적 기원과 성격으로의 의미 전이
사근사근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서글서글하고 상냥하다 혹은 사과나 배 따위를 씹을 때처럼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후자의 정의, 즉 물리적인 식감(Texture)에 대한 묘사다. 어원적으로 이 단어는 삭다(Ferment/Decay) 혹은 사그라지다(Subside)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딱딱하고 억센 것이 적당히 삭아서 부드러워지거나, 불길이 사그라지듯 기세가 유순해진 상태를 나타내는 어근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씹는 소리와 느낌을 흉내 낸 의태어적 요소와 결합해 탄생한 단어로 추정된다. 사근사근이라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어보면, 혀끝이 윗잇몸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며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가 나는데, 이는 마치 잘 익은 배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그 경쾌하면서도 저항감 없는 식감을 청각적으로 재현한다.
방언 화자들은 이 물리적인 감각을 인간의 성격이라는 추상적인 영역으로 과감하게 전이시켰다. 사람을 대할 때 뻣뻣하고 고집스런 사람을 우리는 목석같다거나 씹기 힘든 질긴 고기 같다고 느낀다. 반면, 상대방의 말에 잘 반응해주고, 감정의 교류가 매끄럽게 일어나는 사람을 대할 때는 잘 익은 과일이 입안에서 부서지며 단물을 내는 것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 사근사근하다는 바로 이 관계의 소화력을 표현한 말이다. 그것은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것과는 다르다. 과일이 썩어서 물러터진 것이 아니라, 가장 맛있게 익어서 조직이 적당히 연해진 상태, 즉 자존감은 있되 타인을 향해 열려 있는 성숙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방언 어휘로 곰살맞다나 살갑다 역시 촉각적 기원을 가진다. 살갑다는 살(Skin/Flesh)이 가깝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피부가 닿을 만큼 친밀하고 정이 깊다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곰살맞다 역시 곰살(고의 살, 즉 살결)이 부드럽다는 의미에서 성격의 부드러움으로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방언의 감정 어휘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관념어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고 만지며 느끼는 신체화된 언어(Embodied Language)다. 표준어 좋다나 착하다가 도덕적 판단이나 가치 평가를 내포한다면, 사근사근하다는 화자가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물리적 편안함과 정서적 윤기를 묘사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평가의 언어가 아니라 향유의 언어이며, 타인을 분석의 대상이 아닌 감각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따뜻한 시선을 내포하고 있다.
관계의 미학 고맥락 사회에서 방언 형용사가 수행하는 완충과 조율의 기능
전통적인 한국 사회, 특히 방언이 활발하게 생성되고 유통되던 농경 공동체는 대표적인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 사회였다. 좁은 지역 사회에서 평생을 마주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시적인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관계의 질을 유지하고 갈등을 예방하는 정서적 조율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너 참 좋다 혹은 너 참 착하다와 같은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평가는 자칫 부담스럽거나 영혼 없는 입치레로 들릴 위험이 있다. 반면 사근사근하네, 곰살맞네, 자분자분하네와 같은 방언 형용사들은 구체적인 태도와 행동 양식을 묘사함으로써 칭찬의 진정성을 높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인정받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러한 언어의 섬세함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다. 회사에 새로 입사한 후배가 있었는데, 일을 특별히 잘한다기보다는, 상사나 동료의 말을 들을 때마다 밝고 부드러운 말투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태도가 유난히 인상 깊었다. 말씨가 날카롭지 않고,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저 ‘착하다’ 혹은 ‘성격 좋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한, 묘하게 따뜻하고 말 걸기 쉬운 기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팀장님이 그 후배를 향해 “참 사근사근하네”라고 평하시는 순간, 그 모든 인상이 단 하나의 단어로 정확히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근사근하다는 말이야말로, 그가 가진 말투의 결, 표정의 부드러움, 사람 사이를 잇는 윤기 있는 태도를 가장 잘 포착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만약 “좋은 친구야”라는 평이 나왔다면, 그것은 아마 이처럼 촉감 있게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사근사근하다는 표현은 주로 대화의 태도나 사람을 응대하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말씨가 부드럽고, 눈웃음을 칠 줄 알며,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맞장구쳐주는 사교적 기술을 총칭한다. 시집살이가 고되던 시절, 며느리에게 요구되었던 사근사근함은 단순히 순종적인 태도가 아니라, 긴장된 관계를 이완시키고 집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로서의 능력이었다. 또한 장사하는 사람에게 사근사근함은 손님의 지갑을 여는 최고의 무기였다. 즉, 이 단어는 개인의 내면적 성품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Relating) 능력에 방점을 찍고 있다.
방언 형용사들은 또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도 완곡어법의 기능을 수행하여 관계의 파국을 막아준다. 표준어로 성격이 나쁘다, 싸가지가 없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인격 전체에 대한 비난이 되어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방언으로 데면데면하다, 뚝뚝하다, 무뚝뚝하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현 방식이 거칠거나 서툴러서 접촉면이 매끄럽지 않다는 식감의 문제로 치환된다. 씹기 불편하지만 영양가는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퉁명스럽다보다 더 감각적인 퉁바리 같다(퉁소를 부는 것처럼 입이 튀어나와 불만스럽다)는 표현 역시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시키며 비난의 날카로움을 해학적으로 무디게 만든다. 이처럼 방언의 다채로운 감정 형용사들은 인간관계의 마찰열을 줄이고, 서로의 다름을 감각적인 차이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사회적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것은 논리보다는 정서를, 시시비비보다는 관계의 지속성을 중시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언어적으로 결정화된 것이다.
표준화의 역설과 감정 문맹 효율성의 대가로 잃어버린 마음의 무늬들

현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표준어라는 강력한 도구를 얻었다. 표준어는 전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며, 학문과 기술, 법률을 다루는 데 최적화된 정밀한 언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효율성을 얻는 대가로 언어의 정서적 대역폭을 심각하게 훼손당했다. 학교 교육과 매스미디어는 방언을 촌스럽고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고, 그 과정에서 사근사근하다, 곰살맞다, 살갑다, 구뜰하다, 오지다와 같은 보석 같은 어휘들이 일상어의 목록에서 삭제되거나 화석화되었다. 대신 그 자리를 쿨하다, 나이스하다, 스마트하다와 같은 서구적이고 평면적인 외래어 형용사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교체는 단순히 어휘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타인과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언어 결정론적 입장에서 볼 때,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종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를 감정 문맹(Emotional Illiteracy) 혹은 감정의 빈곤화라고 부를 수 있다. 요즘 세대가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단순히 좋다/싫다, 쩐다/별로다와 같은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나누는 경향이 강해진 것은, 그 사이의 미묘한 회색지대와 질감을 묘사할 언어적 도구를 상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근사근함이 주는 그 간질간질하고 따스한 느낌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의 친절을 단순히 가식이나 목적이 있는 행위로 오해할 수 있다. 곰살맞음이 주는 그 찰지고 끈끈한 정을 모르는 사람은, 깊은 관계가 주는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쿨한 관계만을 찾아 헤맬 수 있다.
표준어 좋다에는 냄새가 없고, 촉감이 없고, 온도가 없다. 그것은 무균실의 언어다. 반면 방언의 감정어들에는 흙냄새가 나고,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며, 거칠거나 부드러운 손길이 묻어 있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방언으로 쓰인 대사에서 더 큰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그 언어가 우리의 원초적인 감각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표준화는 우리에게 속도와 정확성을 선물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다움의 핵심인 공감 능력과 감수성의 섬세함을 앗아갔다.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하지만, AI가 사근사근하다라는 말 속에 담긴 그 미묘한 눈웃음과 공기의 떨림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오직 육체를 가진 인간만이, 그리고 그 언어를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서 비비며 살아온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의 영역일 것이다.
사라지는 말들의 귀환을 위하여, 감각의 언어를 되살리는 길
지금까지 우리는 사근사근하다라는 방언 형용사를 단초로 하여, 방언이 가진 감각적 구체성과 관계 지향적 특성, 그리고 표준화로 인한 감정 언어의 상실 문제를 짚어보았다. 결론적으로 방언의 감정 어휘들은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 구조를 지탱해 온 거대한 뿌리이자, 우리가 타인과 세계를 온몸으로 껴안았던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이 말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교감하던 아날로그적 수용체를 잃어버리고, 차가운 디지털 인터페이스만으로 세상을 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억지로 사투리를 쓰자는 복고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언어 보따리 속에 표준어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방언의 어휘들을 다시 주워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소설과 시 속에 죽어가는 방언 형용사들을 소환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좋다라는 말 대신 곰살맞다, 살갑다, 구수하다와 같은 말을 가르쳐, 그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어야 한다. 미디어는 희화화된 사투리가 아니라, 그 언어가 가진 깊은 울림과 아름다움을 조명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일상에서 타인을 묘사하고 감정을 표현할 때 좀 더 까다로운 미식가가 되어야 한다. 퉁쳐서 좋다라고 말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그 좋음의 질감이 어떤지, 온도가 어떤지, 맛이 어떤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사근사근한지, 슴슴한지, 배지근한지, 아니면 꼬습은지(고소한지)를 찾아내어 적확한 언어로 불러주어야 한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된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우리가 방언의 감정어들을 다시 불러줄 때, 우리의 메마른 인간관계에는 다시 물기가 돌고, 잃어버렸던 감각의 세포들이 깨어날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의 집을 획일적인 아파트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골목마다 다채로운 표정을 가진 한옥 마을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고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근사근하다라는 말이 사전 속의 박제가 아니라, 우리의 입술 위에서 달콤하게 부서지는 살아있는 과육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맛있는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곧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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