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위기 방언의 어원 및 문법 연구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반말체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할까 경계의 언어가 빚어내는 관계의 미학

info-7713 2025. 12. 13. 10:08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충청도식 은근한 말투, 그 속에 숨은 관계의 언어학
충청도 방언의 반존대 화법은 격식과 친밀함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정서적 유대를 강화하는 언어적 완충지대로 작동한다.

 

회색지대의 화법 충청도식 반존대



이분법적 언어 질서를 거부하는 회색지대의 화법 충청도식 반존대의 언어학적 구조와 특징

 

한국어는 전 세계 어느 언어보다도 경어법이 정교하게 발달한 언어다. 주체 높임, 객체 높임, 상대 높임으로 나뉘는 복잡한 문법 체계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유교적 위계질서와 장유유서의 문화를 대변한다. 표준어 문법 체계 안에서 화자는 청자와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에 따라 존댓말을 쓸 것인지 반말을 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십시오체, 해요체, 하게체, 해라체 등으로 나뉘는 등급은 화자와 청자 사이의 권력 관계와 심리적 거리를 수학 공식처럼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언어 질서 속에서는 존대와 하대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며, 그 선을 넘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나거나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충청도 방언, 특히 충청남도의 내륙과 해안 지역을 아우르는 언어권에서는 이러한 표준어의 엄격한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화계가 존재한다. 바로 존댓말인 듯 반말 같고, 반말인 듯하면서도 존대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른바 은근한 반말체 혹은 반존대의 화법이다.

이 독특한 화법은 주로 종결어미의 변용을 통해 실현된다. 표준어의 해요체가 충청도 방언에서는 해요와 해유를 거쳐 혀, 야, 겨 등으로 축약되거나 변형되면서 문법적인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예를 들어 식사하셨어요라는 표준어 존댓말은 충청도에서 진지 드셨어유를 거쳐 드셨슈 혹은 드셨댜로, 더 나아가 드셨어 혹은 드셔 등으로 짧게 발음되지만, 이때의 억양과 어조는 표준어의 반말인 먹었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층위를 가진다. 충청도 방언의 종결어미는 문장의 끝을 명확하게 맺지 않고 길게 늘이거나, 의문형과 평서형의 구분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의도를 문맥 속에서 파악하게 만드는 고맥락적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언어적 현상은 단순한 음운의 탈락이나 축약으로만 볼 수 없다. 이것은 화자가 청자를 대우하는 방식에 있어서 격식과 비격식, 존중과 친밀함이라는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고도의 언어적 전략이 문법화된 결과다.

특히 충청도 방언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려, 잉, 겨 등의 어미는 형식적으로는 반말에 가깝지만, 실제 담화 상황에서는 연장자나 낯선 사람에게도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는 해당 어미들이 존비법의 등급을 표시하는 기능보다는, 화자의 심리적 태도나 정서적 상태를 나타내는 양태적 기능을 더 강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표준어 화자가 보기에 이것은 무례하거나 버릇없는 말투로 오해될 소지가 있지만, 충청도 방언이라는 체계 내부에서 이것은 상대방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딱딱한 격식을 허물어 편안한 소통의 장을 마련하려는 시도다. 즉, 충청도의 은근한 반말체는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수평적인 유대 관계 위로 부드럽게 착륙시키는 언어적 완충 장치이자, 흑백 논리로 재단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회색지대를 포용하는 제3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충청도 방언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자, 언어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독창적인 자산이다.

 

 

 

 

 


체면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는 고도의 공손성 전략 은근함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유대와 갈등 예방

언어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도구이며, 모든 발화 행위에는 화자의 사회적 의도가 담겨 있다.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반말체는 단순히 말을 편하게 하려는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 좁은 지역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서로의 체면을 지켜주려는 고도의 공손성 전략이 작동한 결과다. 언어학자 브라운과 레빈슨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자율성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소극적 체면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적극적 체면이 있다고 정의했다. 직설적인 명령이나 거절, 비판은 상대방의 체면을 위협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충청도 사람들은 이러한 체면 위협 행위를 완화하기 위해 직설화법 대신 우회적이고 은유적인 화법, 그리고 존대와 반말의 경계를 흐리는 반존대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아랫사람이나 친한 이웃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거절해야 할 때, 정색하고 존댓말을 쓰면 거리감이 느껴져 서운함을 줄 수 있고, 그렇다고 대놓고 반말을 쓰면 무례하게 비칠 수 있다. 이때 충청도 화자는 그게 아녀, 좀 거시기하잖여와 같이 종결어미를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여기서 ~여는 해요체의 변이형이면서 동시에 해체의 친근함을 내포하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거절당했다는 불쾌감보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공감을 먼저 불러일으킨다. 또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개 혀(개나 줘라) 혹은 냅둬, 굴러가게와 같이 농담 섞인 반말체를 사용함으로써 비난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고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는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문제의 본질은 정확하게 짚어내는 효율적인 소통 방식이다.

필자 역시 충청남도 공주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중,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힘을 직접 체험한 적이 있다. 마을회관에서 김장을 도우며 김치 속을 버무리는 일을 맡았는데, 어설픈 손놀림에 실수가 잦아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다가오며 그려~ 한 번 해봐유. 뭐 그런 거 다 해보면서 배우는 거여~라고 말해주셨다. 문법적으로는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문장이었고, 종결 어미도 표준어 규범에는 어긋났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에는 전혀 무례함이 없었다. 오히려 긴장을 풀어주는 너그러움과, 실패를 허용하는 따뜻한 유연함이 느껴졌다. 말은 분명 짧았지만, 그 속에 괜찮아, 잘하고 있어, 편하게 해라는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반말체는 내집단 의식을 강화하는 강력한 기제로도 작용한다. 충청도 지역 사회에서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표준어 존댓말은 때로 서울 깍쟁이 혹은 정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반면, 적당히 어미를 뭉개고 반말인 듯 존대인 듯한 말투를 구사하는 것은 나도 당신과 같은 지역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이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이는 화자와 청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대감을 형성하고, 심리적 무장 해제를 유도하여 훨씬 더 깊이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시장통에서 물건을 흥정할 때나 동네 어르신들끼리 바둑을 둘 때 오가는 그 구수한 반말체 속에는, 서로의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이웃사촌 간의 끈끈한 정이 녹아 있다.

이러한 화법은 충청도 특유의 양반 문화와도 연관이 깊다. 체통을 중시하면서도 아랫사람을 널리 포용해야 했던 양반들의 언어 습관이, 권위는 내려놓되 품위는 잃지 않으려는 독특한 하대법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상대를 하대하되 존중을 잃지 않고, 존대하되 비굴하지 않은 이 절묘한 균형 감각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충청도의 인문지리학적 환경 속에서 다듬어진 것이다. 따라서 충청도의 반말체는 단순한 낮춤말이 아니라, 상대를 내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보호하고 배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갈등과 대립을 우회하여 조화를 추구하는 평화의 언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표준화의 파도 속에서 사라지는 뉘앙스의 세계 획일화된 언어가 놓치고 있는 관계의 다양성

현대 사회는 효율성과 속도, 그리고 명확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표준어 중심의 언어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력은 날로 막강해지고 있으며, 지역 방언은 촌스럽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특히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반말체와 같이 미묘한 뉘앙스와 관계의 맥락에 의존하는 언어는 디지털 시대의 직설적이고 단답형인 소통 방식과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욱 빠르게 도태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충청도식 화법의 은근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를 답답하고 애매모호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0과 1로 구분되는 디지털 언어처럼, 관계 또한 쿨하거나 손절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뉘는 현대인들에게, 존대와 반말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줄타기하는 충청도 방언은 해석 불가능한 암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독특한 화법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투리 몇 마디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정서적 도구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표준어의 명확한 존비법은 사회적 위계를 확인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인간 내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고 타인과의 거리감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친구 같은 부모, 존경하는 제자와 같은 현대의 변화된 인간관계를 담아내기에는 깍듯한 존댓말도, 허물없는 반말도 어딘가 부족할 때가 많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충청도 방언의 반존대 화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대안적 소통 모델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친밀함을 표현할 수 있고, 격식을 갖추면서도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이 언어적 지혜는 삭막해져 가는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충청도 방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언어가 품고 있던 느림의 미학, 여백의 여유, 그리고 타인을 향한 은근한 배려의 정신이 우리 삶에서 축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획일화된 표준어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명쾌하게 규정되지만, 그만큼 관계의 탄력성은 줄어들고 갈등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라도 사라져가는 방언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소통의 철학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반말체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관계의 온도를 되찾고, 언어의 다양성을 통해 삶의 질감을 회복하려는 미래 지향적인 시도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려, 알았어~라고 무심하게 던지는 그 말꼬리 속에 숨겨진, 계산되지 않은 인간적인 마음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대체해 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