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말? 환대의 언어? 해남 방언 ‘자기야’에 담긴 관계의 인류학
전남 해남 방언의 ‘자기야’는 연인이 아닌 타인을 따뜻하게 품는 관계의 언어다. 어원과 의미 변천사를 통해, 방언에 담긴 공동체적 정서와 사회적 기능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뜻밖의 고백과 언어의 배반
여행은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낯선 언어와 조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라남도 해남, 한반도의 땅끝이라 불리는 이 고즈넉한 고장에 발을 디딘 외지인들이 종종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혹은 길을 물을 때, 초면인 할머니나 아주머니로부터 자기야라는 호칭을 듣게 되는 경우다. 서울을 비롯한 표준어 화자들에게 자기 혹은 자기야라는 단어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매우 은밀하고 배타적인 애정의 언어다. 그런데 이곳 해남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서, 그것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젊은이에게, 혹은 동성 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 순간 외지인은 혼란에 빠진다. 이것이 나에 대한 호감의 표시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지역 특유의 희롱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이 짧은 찰나의 오해는 한국어라는 거대한 언어의 바다 속에서 표준어와 방언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의미의 지류를 형성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해남 방언에서의 자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인 간의 호칭과는 그 뿌리는 같으나 줄기와 잎사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 언어적 진화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투리의 차이를 넘어, 인간관계를 설정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 즉 화용론적 관점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표준어의 자기가 너와 나 사이의 로맨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해남 방언의 자기는 너를 내 사람처럼 아끼고 존중한다는 공동체적 유대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표준어의 의미가 지방까지 강력하게 침투하면서, 해남의 토박이말 자기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위험한 단어로 전락하거나 젊은 세대에게 외면받는 처지가 되었다. 본고는 해남 방언 자기의 어원적 기원과 의미 확장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추적하고, 이 단어가 지역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는지, 그리고 표준어 중심주의 속에서 어떻게 그 고유한 의미가 왜곡되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어 하나에 담긴 지역민들의 삶의 태도와, 소멸해가는 방언이 품고 있는 관계의 미학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재귀대명사에서 2인칭 대명사로의 이동과 심리적 기제
자기(自己)라는 단어의 한자 구성을 살펴보면, 스스로 자(自)에 몸 기(己)를 쓴다. 즉,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 자신, 바로 나를 뜻한다. 문법 용어로 이를 재귀대명사라고 한다. 철수는 자기가 천재인 줄 안다라는 문장에서 자기는 주어인 철수를 다시 가리키는 3인칭 재귀대명사로 쓰인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가리키던 이 단어가 어떻게 너를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로 둔갑하게 되었을까.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인칭의 전이 현상을 타자(The Other)를 자아(The Self)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심리적 동일시 기제에서 찾는다.
나를 뜻하는 단어를 상대방에게 사용하는 현상은 비단 한국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일본어의 지분(自分)이나 영어의 Myself가 구어체에서 간혹 2인칭처럼 쓰이는 오류 혹은 변용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한국어, 특히 해남 방언에서 자기가 2인칭으로 정착된 과정은 한국 특유의 정(情)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자가 청자를 남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나 자신처럼 가깝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를 지칭하는 단어를 너에게 투영한 것이다. 이는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심리적 일체감을 언어적으로 실현한 고도의 은유 전략이다.
해남 방언의 자기가 2인칭으로 굳어진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근대 이후 개화기 신소설이나 문학 작품에서 당신, 자네, 자기 등의 대명사가 혼재되어 사용되던 시기와 맞물려 지역적으로 독자적인 분화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중심의 표준어에서는 당신이라는 단어가 부부 사이나 대등한 관계에서의 2인칭으로 정착(물론 싸울 때 쓰는 당신도 있지만)되는 동안, 해남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흥미로운 점은 표준어의 당신 역시 당해 신(當該 身), 즉 바로 그 몸이라는 뜻으로, 3인칭 재귀대명사에서 출발하여 2인칭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자기와 동일한 문법적 진화 경로를 밟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당신은 존중과 거리감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자기는 친밀감과 유대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분화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해남 방언의 자기는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 한국어 대명사 발달사에서 나타날 수 있는 매우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의미 변화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다.
해남 방언 자기의 의미론적 지도 연인이 아닌 관계의 확장성
그렇다면 해남 방언에서 자기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가. 표준어 화자들의 예상과 달리, 해남의 자기는 성별과 연령, 친소 관계를 가로지르는 매우 폭넓은 지시 대상을 갖는다. 가장 대표적인 용법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다. 시장 좌판의 할머니가 지나가는 여대생을 보고 "자기야, 이거 보고 가"라고 할 때, 혹은 식당 주인이 젊은 손님에게 "자기는 뭣을 먹을라요?"라고 물을 때가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자기는 표준어의 학생, 총각, 아가씨 혹은 저기요를 대신하는 호칭이다. 하지만 그 뉘앙스는 훨씬 부드럽고 따뜻하다. 혼자 해남 여행 중에, 식당에서 이 호칭을 실제로 접한 적이 있다. 식사를 하러 들어간 한 조그마한 식당에서,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반찬을 내어주시며 “자기야, 반찬 더 줄까?”라고 물어오셨다. 순간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표준어에 익숙한 귀에는 이 호칭이 마치 사적인 관계에서만 허용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곧, 식당 안 다른 손님들에게도 아주머니가 똑같이 “자기야, 물 좀 따라 마셔요~”라며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자기야’는 단지 특정한 감정이나 관계를 암시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낯선 이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일상어였던 것이다. 그 안에는 상대방을 내 사람처럼 대하겠다는 소박하고도 강한 공동체적 정서가 스며 있었다. 말은 짧고 익숙했지만, 그 호칭 속에는 ‘당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감정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상대를 손님이나 낯선 타인으로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손주나 조카처럼 살갑게 대하겠다는 화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남 방언의 자기는 동년배 친구나 가까운 지인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쓰인다. 여고생들이 서로를 "자기야"라고 부르거나, 중년의 여성들이 계모임에서 서로를 "자기"라고 칭하는 것은 해남에서는 아주 흔한 풍경이다. 심지어 부부 사이가 아닌 이성 간에도, 특별한 연애 감정 없이 친밀함을 표시하기 위해 이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직장 동료 사이에서 "김 대리" 대신 "자기야"라고 부르는 것이 성희롱이 아니라 동료애의 표현으로 용인되는 독특한 화용론적 공간이 바로 해남이다. 이는 자네라는 호칭이 하대와 평대 사이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듯, 해남의 자기는 존대와 하대, 격식과 비격식의 경계를 허물고 정서적 거리를 0으로 수렴시키는 마법의 단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단어가 어린아이를 부를 때도 쓰인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우리 자기 왔는가"라고 말할 때, 이 자기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 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는 극존칭의 사랑을 내포한다. 표준어권에서 어린아이에게 자기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 해남 방언의 자기가 가진 의미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에로스(Eros)적인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필리아(Philia)와 아가페(Agape)적인 사랑을 모두 포괄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애정과 호의를 담는 그릇이다. 따라서 해남의 자기는 영어의 Honey나 Darling보다는, 상황에 따라 You, My dear, My friend, My child를 모두 아우르는 만능 대명사에 가깝다.
사회언어학적 갈등과 소멸 표준어의 침투와 의미의 오염
그러나 오늘날 해남 방언의 자기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는 방언 사용 인구의 감소라는 자연적인 소멸 과정뿐만 아니라, 표준어의 의미가 방언의 의미를 덮어씌우고 오염시키는 사회언어학적 충돌에서 기인한다. 1990년대 이후 TV 드라마와 대중가요가 보급되면서, 자기=연인이라는 표준어의 도식이 해남 지역 사회에도 강력하게 이식되었다. 젊은 세대는 미디어를 통해 학습한 표준어의 규범을 내면화했고, 그 결과 할머니가 쓰는 자기를 촌스럽거나 혹은 부적절한 언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외부와의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용론적 실패(Pragmatic Failure)다. 해남을 방문한 관광객이나 해남으로 이주한 타지인들이 현지인의 자기를 오해하여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성적인 의도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식당 아주머니가 호의로 건넨 "자기는 반찬 더 줄까?"라는 말에 정색을 하며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라거나 "저를 언제 봤다고 자기라고 하세요?"라고 반응하는 식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피드백이 반복되면서, 해남 토박이 화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검열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에게는 자기를 쓰지 말아야겠다,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위축감이 확산되면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따뜻한 호칭은 점차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삼켜지고 있다.
이것은 언어의 식민지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중앙의 언어 규범이 지방의 고유한 언어 습관을 '틀린 것' 혹은 '이상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자리를 대체해버리는 것이다. 자기라는 단어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단어가 품고 있던 '공동체적 유대'라는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배타적 연애 감정'이라는 표준어의 의미만 남게 되는 셈이다. 이제 해남의 젊은이들은 친구에게 자기라고 부르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연인에게만 쓰는 말이라고 학교와 TV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결국 해남 방언 자기는 단어의 형태는 살아남았으나, 그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 채 껍데기만 남은 유령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어휘 하나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해남 사람들이 타인을 대하던 그들만의 따뜻하고 허물없는 방식, 즉 관계의 문법이 붕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관계의 언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지금까지 전남 해남 방언 자기야의 어원적 기원과 의미론적 확장, 그리고 표준어와의 충돌로 인한 소멸 위기를 살펴보았다. 해남의 자기는 나를 낮추고 너를 높이며, 너와 나를 하나로 묶으려 했던 남도 사람들의 관계 지향적 세계관이 응축된 결정체다. 그것은 삭막한 타인들의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가 되어주는 확장된 가족주의 사회의 유산이다. 표준어의 자기가 둘만의 밀실에 갇힌 폐쇄적인 사랑이라면, 해남 방언의 자기는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 아래서 모두가 나누어 갖는 개방적인 정(情)이다.
언어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박물관에 죽은 단어를 전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기억하는 일이다. 자기라는 단어 하나에 담길 수 있는 의미가 연인뿐만 아니라 친구, 이웃, 아이, 그리고 낯선 나그네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다층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해남 방언의 자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을 나의 분신처럼 아끼고 환대할 수 있는 언어적 도구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제라도 이 단어에 덧씌워진 오해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안에 담긴 진짜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 해남 여행길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자기야, 어서 와"라는 인사말을 성가신 호객 행위나 부적절한 주책으로 치부하지 않고, "당신을 내 가족처럼 귀하게 여깁니다"라는 최상의 환영 인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문해력이 필요하다. 표준어의 잣대로 방언을 재단하지 않고, 그 다름 속에 숨겨진 깊은 속뜻을 헤아릴 때, 우리의 언어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해남 방언 자기라는 집에는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따뜻한 오지랖'과 '사람 냄새'가 살고 있다. 그 집이 완전히 허물어지기 전에, 우리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소멸해가는 모든 방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부탁일지도 모른다.
'소멸 위기 방언의 어원 및 문법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전북 방언 겉다는 왜 젊은 세대가 이해하지 못할까 세대 간 언어 단절의 심연과 추측의 문법학 (0) | 2025.12.14 |
|---|---|
| 부산 사투리 가이소는 언제 어떻게 쓰일까 실용 예문 중심의 화용론적 분석과 지역 정서의 미학 (0) | 2025.12.14 |
| 충청도 방언의 은근한 반말체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할까 경계의 언어가 빚어내는 관계의 미학 (0) | 2025.12.13 |
| 방언의 감정 표현 차이 좋다 대신 사근사근하네의 어감과 촉각적 언어의 인류학 (1) | 2025.12.12 |
| 경상도 할머니의 마는 왜 공격적으로 들릴까 담화적 기능 분석과 침묵의 경제학 (0) |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