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의 획일을 넘어
제주 ‘배지근하다’, 전라 ‘개미지다’, 경상 ‘깔쌈하다’, 충청 ‘슴슴하다’로 읽는 방언 미각어 미시사
표준화가 지운 감각을 복원하고 언어와 미각의 상호작용을 드러내다
미각의 빈곤과 표준어의 독재 속에서 잃어버린 맛의 지도를 찾아서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은 언어라는 필터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으로 인지하는 것은 우리 언어가 그것을 일곱 가지 단어로 분절해 놓았기 때문이다. 미각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혀끝에 닿는 감각은 수천수만 가지의 미세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 풍요로운 감각의 제국은 맛있다라는 단 하나의 거대하고 납작한 단어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다. 텔레비전의 먹방 프로그램이나 유튜브의 맛집 리뷰를 보면, 음식을 표현하는 어휘가 맵다, 달다, 짜다, 그리고 맛있다라는 네 가지 범주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함을 목격하게 된다. 단짠단짠이나 겉바속촉 같은 신조어들이 등장했지만, 이는 자극적인 물리적 식감이나 일차원적인 맛의 조합을 묘사할 뿐, 재료가 가진 본연의 풍미나 조리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의 층위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미각 언어의 빈곤화는 곧 미각 경험의 빈곤화로 이어진다. 이름을 잃어버린 맛은 기억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 맛은 결국 식탁 위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선을 서울 중심의 표준어에서 지방의 방언으로 돌리면, 우리는 놀랍도록 정교하고 다채로운 맛의 언어들을 발견하게 된다. 제주의 배지근하다, 전라도의 개미지다, 경상도의 깔쌈하다, 충청도의 슴슴하다와 같은 방언 형용사들은 표준어 맛있다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각 지역의 고유한 식문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환경이 농축된 언어적 결정체들이다. 이 단어들 속에는 척박한 땅에서 생존을 위해 고기를 삶았던 제주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곰삭은 젓갈 항아리 앞에서 인내의 시간을 견뎌낸 전라도 어머니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 본고는 표준어의 그물에는 걸리지 않는 이 미세하고 독특한 방언 미각어들의 어원과 의미를 추적하고, 언어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맛과 언어, 그리고 존재의 상관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투리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의 해상도를 복원하려는 미시사적 탐구이다.
제주의 배지근하다 척박한 화산섬이 갈구했던 지방의 위로와 공동체의 맛
제주도 방언 배지근하다는 육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난해한 단어다. 표준어 사전이나 번역기는 이를 기름지다 혹은 감칠맛이 나다 정도로 해석하려 들지만, 제주 토박이들에게 이러한 번역은 배지근하다가 가진 본질적 뉘앙스의 10퍼센트도 담아내지 못한 오역에 가깝다. 배지근하다는 단순히 기름기가 많아 느끼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느끼함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묵직하고 든든하며 입안에 착 감기는 고기 국물의 깊은 맛을 칭송하는 최상급의 찬사다.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주의 지리적 환경과 식문화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화산섬 제주는 쌀농사가 어렵고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척박한 땅이었다. 거친 바닷바람과 싸우며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나, 중산간 지대의 돌밭을 일구는 농부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양소는 단백질과 지방이었다. 그러나 고기는 귀했다. 마을에 혼례나 상례 같은 큰일이 있을 때 추렴하여 잡는 돼지 한 마리는 마을 공동체 전체의 영양 공급원이었다. 이때 제주 사람들은 고기를 구워 먹는 낭비를 범하지 않았다. 뼈와 내장, 순대, 그리고 살코기까지 모든 부위를 큰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로 오랫동안 푹 고아내어 국물을 만들었다. 이 돼지 육수에 해조류인 모자반을 넣으면 몸국이 되고, 국수를 말면 고기국수가 된다. 바로 이 국물을 한 숟가락 떴을 때,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지방의 고소함과 뼈에서 우러나온 젤라틴의 걸쭉함, 그리고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느껴지는 그 든든한 포만감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바로 배지근하다이다.
배지근하다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뱃속을 뜻하는 배와 묵직함을 뜻하는 지근하다가 결합했을 가능성, 혹은 맛이 배어있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제주의 혼례식이나 잔칫집에서 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국물 맛이 참 배지근하다"라는 말은 "음식을 참 잘 장만했다", "주인의 인심이 후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라는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육지의 기름지다가 과잉된 지방에 대한 거부감을 일부 포함한다면, 제주의 배지근하다는 생존에 필수적인 지방에 대한 본능적인 갈구와 감사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단순한 미각 형용사가 아니라, 결핍의 시대를 함께 건너온 제주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확인시켜 주는 정서적 언어다. 배지근한 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나눠 먹을 줄 알았던 제주의 넉넉한 인심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다.
전라도의 개미지다 시간과 미생물이 빚어낸 발효의 미학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지역이 전라도라면, 전라도의 맛을 대표하는 단어는 단연 개미지다 혹은 개미가 있다일 것이다. 타 지역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곤충 개미를 떠올리며 의아해하지만, 전라도 식객들에게 개미는 맛의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의미한다. 표준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 먹고 난 뒤에 여운이 남는 감칠맛, 깊은 맛 등으로 풀이할 수 있겠으나, 그 어떤 단어도 개미가 가진 그윽한 뉘앙스를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한다. 개미는 혀끝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일차적인 맛이 아니라, 목넘김 이후에 비강을 타고 올라오는 향기와 시간차를 두고 혀뿌리에서 올라오는 복합적인 풍미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개미지다는 전라도 특유의 발효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젓갈을 듬뿍 넣어 담근 김치가 땅속 항아리에서 한겨울을 나고 묵은지가 되었을 때, 혹은 삭힌 홍어가 톡 쏘는 암모니아 향과 함께 알싸한 감칠맛을 낼 때, 전라도 사람들은 "아따, 그놈 참 개미가 있네"라고 감탄한다. 이는 갓 지은 밥이나 금방 무친 나물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시간과 미생물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제3의 맛이다. 과학적으로는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생성되는 아미노산의 감칠맛(Umami)과 관련이 있겠지만, 개미는 단순한 화학적 감칠맛을 넘어선다. 그것은 곰삭음의 미학이다. 재료가 가진 원형질이 파괴되고 부패의 직전 단계까지 발효되면서 생성되는 그 아슬아슬하고 오묘한 맛의 경계를 포착해 낸 언어가 바로 개미다.
어원적으로 개미는 맛에 더해지는 특별한 것, 즉 가미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갯벌의 맛 즉 바다의 맛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민간 어원학적으로 볼 때 개미는 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맛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는 전라도 음식들이 대체로 양념이 강하고 간이 세지만, 그 자극적인 양념 뒤에 숨겨진 재료 본연의 깊이를 음미하려는 전라도 사람들의 미식 태도를 반영한다. 개미지다는 인스턴트식품이나 패스트푸드에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형용사다. 그것은 기다림의 맛이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맛이다. 따라서 개미지다라는 단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음식을 기다려줄 인내심을 잃고,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깊이의 가치를 망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미는 혀로 느끼는 맛이 아니라, 세월로 느끼는 맛이기 때문이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미각어 직관적인 타격감과 은근한 여백의 미
제주와 전라도가 맛의 깊이와 무게감을 중시한다면, 경상도와 충청도의 방언 미각어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맛의 리듬과 여백을 표현한다. 경상도 방언, 그중에서도 부산과 경남 해안가에서 자주 쓰이는 깔쌈하다는 매우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미각어다. 본래 옷차림이나 외모가 말쑥하고 멋지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맛을 표현할 때는 음식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비린내나 잡내가 없으며, 뒷맛이 개운하다는 뜻으로 확장된다. 갓 잡은 생선회나 맑은 복국을 먹었을 때 터져 나오는 "국물이 억수로 깔쌈하네!"라는 탄성에는 경상도 특유의 직설적이고 화끈한 기질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복잡한 조리법이나 묵직한 발효보다는, 재료의 신선도를 최우선으로 치는 해안가 사람들의 미식 기준을 보여준다. 깔쌈하다는 혀에 남는 잔여감 없이 깨끗하게 떨어지는 맛의 타격감을 묘사하는, 매우 공감각적인 형용사다.
반면 충청도 방언, 특히 내륙 지방의 미각어는 은근하고 소박하다. 대표적인 것이 슴슴하다 혹은 심심하다이다. 표준어 화자에게 심심하다는 간이 싱거워서 맛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충청도나 황해도 등지에서 이 말은 자극적이지 않고 순하며, 재료 본연의 맛이 은은하게 살아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평양냉면의 육수를 묘사할 때 흔히 쓰이는 이 단어는, 맵고 짜고 단 자극적인 맛의 홍수 속에서 쉼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구수하다보다 한 단계 더 깊고 흙내음이 나는 굻다는 표현도 있다. 된장찌개나 숭늉의 맛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이 말은, 충청도 내륙의 농경 문화가 길러낸 투박하지만 진실된 맛을 대변한다. 충청도의 미각어는 맛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재료가 가진 맛이 천천히 우러나와 먹는 이의 마음에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이는 충청도 사람들의 화법, 즉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은유와 여백을 중시하는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외에도 강원도의 들큰하다(기분 나쁘지 않은 묘한 단맛), 함경도의 쩡하다(동치미 국물 등이 톡 쏘듯이 시원하다) 등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질을 닮은 무수한 미각 형용사들이 존재한다. 이 단어들은 단순히 맛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이 세상을 맛보고 느끼는 방식을 규정하는 인지적 틀이다.

언어 상대성 이론과 번역 불가능성 언어가 없으면 맛도 없다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자민 리 워프는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사고와 인식을 지배받는다"는 언어 상대성 이론을 주창했다. 이 이론을 미각의 영역에 적용해 보면 매우 흥미롭고도 서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배지근하다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제주도 고기국수를 먹을 때 그 맛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으며, 개미지다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은 묵은지의 깊은 맛을 단순히 오래된 신맛으로만 인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언어는 감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없으면 물을 담을 수 없듯이, 맛을 표현할 어휘가 없으면 그 미묘한 감각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무의식의 심연으로 흩어져 버린다.
번역학에서는 이를 번역 불가능성(Untranslatability)이라고 부른다. 어떤 언어의 특정 단어가 가진 문화적 맥락과 뉘앙스가 너무나 독특하여, 다른 언어로는 1대 1로 대치될 수 없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의 방언 미각어들은 대부분 이 번역 불가능성의 영역에 속한다. 배지근하다를 영어의 Savory나 Rich로 번역하는 순간, 제주 바다의 바람 냄새와 돼지 육수의 끈적함은 증발해 버린다. 개미지다를 Deep taste로 번역하는 순간, 전라도 항아리의 숨 쉬는 소리는 사라진다. 표준어 맛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방언의 다채로운 미각어들을 맛있다라는 하나의 단어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흑백 복사기로 인쇄하는 것과 같은 폭력이다. 우리는 표준화를 통해 소통의 효율성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감각의 디테일과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방언 미각어의 소멸은 곧 우리 미식 세계의 축소를 의미한다.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맛의 어휘가 줄어들수록,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맛의 범위도 좁아진다. 결국 우리는 캡사이신의 매운맛과 설탕의 단맛, 그리고 MSG의 감칠맛이라는 세 가지 원색 물감만으로 그려진 조잡한 미각의 세계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멸종 위기에 처한 방언 형용사들을 채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철학적 이유다.
미각어의 사회학 굶주림의 역사와 포만감의 기억
방언 미각어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굶주림의 역사가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배지근하다는 고기 국물이 주는 귀한 포만감에 대한 찬사였고, 개미지다는 저장 음식을 통해 배고픈 겨울을 나야 했던 절박함 속에서 피어난 미학이었다. 과거 우리 조상들에게 맛이라는 것은 미식의 대상이기 이전에 생존의 문제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방언 미각어들은 대부분 영양가가 풍부하고, 소화가 잘 되며,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음식들에 대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
예를 들어 구수하다는 곡물이 익었을 때 나는 냄새와 맛을 표현하는데, 이는 탄수화물 공급원에 대한 본능적인 선호를 반영한다. 시원하다가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도 쓰이는 역설은, 그 국물이 뱃속에 들어가 장기를 이완시키고 체온을 높여주는 생리적 안도감을 표현한 것이다. 즉, 방언 속의 맛은 혀끝의 쾌락이 아니라 몸 전체가 느끼는 안녕감(Well-being)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맛의 개념은 급격히 변질되었다. 굶주림이 해결된 시대에 맛은 더 이상 생존의 신호가 아니라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 자극적이고 중독성 있는 맛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배지근하다나 슴슴하다 같은 단어는 낡고 매력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대신 존맛탱(JMT), 마라맛, 단짠 같은 말초적인 신조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언어의 교체는 우리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생존과 공생에서 소비와 쾌락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사회학적 지표다. 방언 미각어의 쇠퇴는 단순히 어휘의 소멸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몸을 돌보고 공동체와 나누던 전통적인 식문화의 붕괴를 의미한다.
표준화의 폭력과 미각의 획일화 맛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표준어 정책과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방언의 설 자리를 좁히는 주범이다. 방송에서는 전국 팔도의 맛집을 소개하면서도, 그 맛을 묘사하는 자막에는 늘 표준어 자막이 달린다. 부산 할머니가 "국물이 시원하이 쥑인다!"라고 외쳐도, 자막은 "국물이 정말 시원하네요"라고 순화되어 나간다. 이러한 끊임없는 교정 작업은 방언이 가진 고유한 질감과 에너지를 거세한다. 서울말이 권력의 언어가 되면서, 서울 사람들의 입맛 또한 맛의 표준이 되어버렸다. 서울식으로 개량된 덜 맵고 덜 짠 음식, 퓨전화된 음식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지역 고유의 맛은 사라지거나 관광용 상품으로 박제화된다.
이것은 미각의 제국주의다. 맛에는 표준이 있을 수 없다. 제주의 맛은 제주말을 써야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고, 전라도의 맛은 전라도말로 묘사해야 제맛이 난다. 방언 미각어를 지키는 것은 곧 미각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각 지역이 가진 고유한 맛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 다름을 즐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맛있다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음식을 퉁치려 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미각적 문맹으로 만드는 것이다.
최근 들어 로컬 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역 방언을 브랜드 네이밍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랑께빵, 멍게가 조아 등 방언을 활용한 마케팅은 비록 상업적인 목적이라 할지라도, 대중들에게 잊혀진 방언의 맛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단순한 이름 빌리기를 넘어, 그 단어 속에 담긴 식문화의 철학까지 복원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혀끝의 기록, 소멸하는 세계에 대한 애도
지금까지 우리는 배지근하다부터 개미지다까지, 사라져가는 방언 미각어들의 세계를 탐험했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형용사가 아니다. 그것은 각 지역의 사람들이 자연과 투쟁하고 타협하며 만들어낸 생존의 기록이자, 밥상머리에서 나누었던 정서적 교감의 흔적이다. 이 말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돼지 국물에서 제주의 바다를 느끼지 못하고, 묵은지에서 전라도의 시간을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의 상실은 존재의 빈곤을 낳는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맛의 세계가 좁아질수록, 우리의 삶도 그만큼 척박해진다. 그러므로 방언 미각어를 채록하고 연구하는 것은 국어학자들의 책상 위에서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세 번 식탁을 마주하는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 할 일상의 인문학이다. 오늘 저녁, 식탁 위에 오른 음식을 보며 습관처럼 맛있다라고 말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보자. 그리고 혀끝에 집중해 보자. 이 맛이 슴슴한지, 배지근한지, 아니면 개미가 있는지. 우리 할머니들이 썼던 그 오래된 단어들을 기억해 내어 불러보자.
맛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맛은 비로소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저장된다. 방언은 촌스러운 사투리가 아니라, 우리 미각의 해상도를 4K, 8K로 높여주는 고성능 렌즈다. 이 렌즈를 통해 바라본 밥상은 더 이상 허기를 채우는 사료가 아니라, 풍성한 이야기와 철학이 담긴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박제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지켜내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숟가락을 든 우리들의 언어적 감수성에 달려 있다. 혀끝에서 시작되는 이 작은 기록들이 모여, 한국의 식문화라는 거대한 지도를 완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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