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가람의 귀환
방언·지명 속 고어의 생존과 김유정·백석이 빚은 문학적 승화, 그리고 기록의 당위
표준어가 지운 고어 ‘뫼·가람’이 방언·지명·문법 화석에 살아 있음.
김유정·백석이 이를 미학으로 승화.
사라지는 어휘를 디지털 아카이빙해 한국어의 뿌리·다양성 회복을 제안.
언어의 지층학 표준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고어의 섬들
언어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며 소멸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중심부의 권력과 문화다. 한국어의 역사에서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는 효율성과 표준화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토박이말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거나 삼켜버렸다. 특히 한자어의 유입과 근대화 과정은 순우리말 어휘가 설 자리를 급격히 축소시켰다. 산이라는 한자어가 뫼라는 순우리말을 대체했고, 강이라는 단어가 가람이라는 고유어를 밀어냈다. 표준어 사전에서 이 단어들은 이제 고어 혹은 아어(우아한 말)라는 꼬리표를 달고 박물관의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선을 중심부에서 변방으로, 표준어에서 방언으로 돌리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죽은 줄 알았던 15세기의 언어들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그 싱싱한 어휘들이 특정 지역의 방언 속에서는 여전히 펄떡이는 생명력을 가지고 일상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은 단순히 표준어가 변형되거나 사투리 억양이 섞인 하위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중앙의 언어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도태된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단절이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언어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된 타임캡슐이다. 언어학적으로 이를 변방 보존의 법칙이라 부른다. 중심부에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날 때,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은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옛것을 지켜낸다는 이론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흔히 촌스럽다고 여기는 시골의 말들은 사실 한국어의 가장 오래된 지층을 보여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현장이다. 땅속에 묻힌 공룡 화석을 발굴하듯, 방언 속에 숨겨진 고어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우리 말이 원래 어떤 소리와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복원하는 과정이다. 본고는 표준어의 위세에 밀려 사라진 줄 알았던 뫼, 가람과 같은 순우리말 고어들이 방언과 지명 속에 어떻게 화석처럼 박혀 생존하고 있는지 추적하고, 나아가 김유정과 백석 같은 문학가들이 이 방언 어휘들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는지 분석함으로써 사라져가는 말들의 미학적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지명과 일상어에 박제된 순우리말 뫼와 가람의 끈질긴 생명력
중세 국어 시기까지만 해도 산(Mountain)을 뜻하는 보편적인 단어는 뫼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용비어천가와 같은 초기 문헌을 보면 산이라는 한자어 대신 뫼 혹은 메라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한자어가 일상어의 지위를 잠식하면서 뫼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현대 표준어에서 뫼는 무덤을 뜻하거나, 메아리(뫼의 소리)와 같은 합성어 속에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방언의 세계, 특히 지명(Toponym)의 세계로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전국 각지의 산골 마을 이름이나 고개 이름에는 여전히 뫼의 변이형들이 끈질기게 붙어 있다.
예를 들어 강원도나 경상도 내륙 산간 지방의 지명을 살펴보면 몰, 말, 모루와 같은 접미사가 붙은 곳들이 많다. 큰말, 윗모루, 잣모루 등의 지명에서 모루나 말은 마을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원적으로는 산등성이이나 산마루를 뜻하는 뫼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다. 뫼가 뫼->마->말/몰로 음운 변화를 겪으며 지명 속에 화석화된 것이다. 특히 충청도나 전라도 방언에서 산소를 뫼똥이라 부르거나, 제사상에 올리는 밥을 메라고 부르는 것 또한 산과 신성함을 연결했던 고대어의 흔적이다. 산은 곧 신이 사는 곳이고, 조상이 돌아가는 곳이었기에 뫼라는 단어는 신성한 제의적 언어 속에 살아남았다.
강을 뜻하는 가람 역시 마찬가지다. 가람은 길다(Long)라는 형용사 어근이나 갈라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우리말이다. 현대인들에게 가람은 시적인 표현이나 가게 이름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지리학적 명칭 속에는 그 원형이 숨 쉬고 있다. 낙동강 유역이나 섬진강 주변의 옛 지명들을 연구해 보면 갈, 걸, 가라와 같은 음소를 포함한 지명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는 가람이 축약되거나 변형되어 땅의 이름으로 고착된 사례다.
서울에서도 고어 ‘가람(=강)’의 잔존을 손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남편과 지난 주말에 한강 산책로를 걷다가 “가람커피”, “가람도서관”, “가람마켓” 같은 간판을 보았다. 표준어 일상어에서 ‘가람’은 거의 소멸했지만, 상호(商號)·공공시설 명칭에는 ‘강’의 시적·토착적 표상을 불러오는 기표로 재소환된다. 이는 본문에서 논의한 “변방 보존, 표상 전이”의 전형적 경로다. 즉, 일상 어휘 층위에서는 밀려난 고어가 지명·브랜딩 층위에서 미학적 가치(지역성, 서정성)를 획득해 상징어(signet)로 살아남는 양상이다. 한강이라는 거대 수계를 배경으로 ‘가람’이 재맥락화될 때, 우리는 고어가 단순한 박물관 표본이 아니라 현대 도시 기호 체계 속에서 계속 사용·해석되는 살아 있는 레마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은 뫼/가람의 “지명·간판화”가 고어의 생존 전략임을 실증하며, 동시에 문학적 승화(백석의 향토어, 김유정의 토속어)와 맞물려 언어의 심층 기억을 오늘의 생활 기호로 번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경상도 방언에서 강가나 물가를 갈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 갈 역시 가람의 어원적 파편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농기구나 생활 도구의 명칭 속에 숨어 있는 고어들이다. 쟁기라는 표준어 대신 강원도나 함경도 방언에서 쓰이는 극젱이나 가라라는 말, 그리고 부엌을 뜻하는 정지라는 말은 중세 국어의 형태를 거의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정지는 단순히 부엌의 사투리가 아니라, 솥을 걸어두는 곳이라는 의미의 고유어 정주가 변한 말이다. 무를 뜻하는 무수(경상/전라), 오이를 뜻하는 물외(제주/전라) 역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와 발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무와 오이라고 말하며 어휘의 형태를 단순화할 때, 지방 사람들은 수백 년 전의 조상들이 쓰던 단어의 원형을 무의식중에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휘들은 방언이 단순히 지역적 특색을 넘어, 국어사의 살아있는 박물관임을 증명한다.
중세 국어의 문법적 화석 방언 속에 숨은 조사와 어미의 비밀
고어의 흔적은 단어(명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장을 구성하는 문법적 요소, 즉 조사와 어미에서도 중세 국어의 문법적 특징이 방언 속에 놀랍도록 생생하게 남아 있다. 표준어 문법에서는 사라져버린 불규칙 활용이나, 특수한 조사들이 특정 지역에서는 여전히 현역 문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학자들에게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과 같은 희열을 선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주격 조사 이/가의 쓰임이다. 중세 국어 시기에는 주격 조사 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이만이 쓰였다. 현대 표준어에서는 받침이 있으면 이(사람이), 없으면 가(철수가)를 쓰지만, 남부 방언,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의 노년층 화자들은 받침이 없는 명사 뒤에도 이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새가 날아간다가 아니라 새이 날아간다라고 하거나, 누가 왔느냐 대신 누이 왔노라고 말하는 것이 그 예다. 이는 주격 조사 가가 일반화되기 전, 즉 17세기 이전의 국어 문법이 방언 속에 화석처럼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서울말이 문법적 편의를 위해 새로운 조사를 받아들일 때, 방언은 옛 문법을 고수하며 언어의 보수성을 지켜낸 것이다.
또한 의문형 어미의 활용에서도 고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앞선 섹션에서 다루었던 경상도 방언의 -노와 -나 구분(설명 의문문과 판정 의문문의 구별)은 15세기 중세 국어의 -고와 -가 구별과 정확히 대응한다. 중세 국어에서 뉘 오뇨(누가 오느냐)와 엇뎨 하뇨(어찌 하느냐)처럼 의문사가 있을 때는 오 계열 어미를 썼는데, 이것이 경상도 방언의 -노로 계승된 것이다. 표준어에서는 이 엄격한 문법적 구분이 사라지고 -니, -냐 등으로 통일되었지만, 방언은 500년 전의 문법 규칙을 뇌 속에 내재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목적격 조사 을/를의 생략이나 변형 또한 흥미롭다. 중세 국어에서는 조사의 생략이 빈번했고, 모음 조화에 따라 알/를/을/ㄹ 등으로 다양하게 실현되었다. 강원도나 충청도 방언에서 밥을 먹었니를 밥으 먹었니 혹은 밥알 먹었니처럼 발음하는 것은, 엄격하게 표준화된 현대 문법이 재단해버린 다양한 조사의 변이형들이 민중의 입말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문법적 화석들은 방언이 단순히 틀린 말이 아니라, 한국어의 문법적 가능성이 과거에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표준어가 정답이라는 규범에 갇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언어의 다양한 갈래들이 방언이라는 숲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과 강원 영서 방언의 해학: 토속어의 미학적 기능

문학은 언어가 피워내는 꽃이다. 그리고 방언은 그 꽃을 피우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다. 1930년대 한국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소설가 김유정은 강원도 영서 지방(춘천)의 방언을 문학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구사한 작가다. 그의 대표작 봄봄이나 동백꽃을 보면, 방언은 단순히 시골이라는 배경을 묘사하기 위한 소품이 아니다. 방언 그 자체가 인물의 성격을 형성하고, 사건의 해학성을 극대화하며, 작품 전체의 미학적 분위기를 주도하는 주인공 역할을 한다.
김유정의 소설에서 점순이나 나의 대화에 등장하는 어휘들을 살펴보자. 그는 표준어의 매끄러운 어휘 대신, 거칠고 투박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강원도 토박이말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예를 들어,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주인공을 괴롭힐 때 쓰는 느 집엔 이거 없지?라는 대사나, 봄봄에서 장인과 사위가 다투는 장면에서 나오는 맹태(명태), 빙장님(장인어른의 방언형), 않다(아니하다의 방언) 등의 어휘는 인물들의 어수룩하면서도 욕망에 충실한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만약 이 대사들이 표준어로 번역되었다면 어땠을까. 점순이의 당돌함과 나의 어리숙함이 빚어내는 그 절묘한 희극적 긴장감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특히 김유정이 구사하는 어미의 활용은 주목할 만하다. 강원도 방언 특유의 -래요(실제로는 -지 않소, -드래요 등의 변이형)나 툭툭 끊어지는 말투는 소설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김유정은 고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넘어, 방언이 가진 음성적 질감(Texture)을 문체 속에 녹여냈다. 그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흙냄새와 풀냄새는 표준어의 추상적인 어휘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감각적인 영역이다. 그는 놈, 년과 같은 비속어와 방언을 적절히 배합하여, 식민지 시대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그리면서도 그 속에 깃든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낙천성을 해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김유정에게 방언은 촌스러움이 아니라, 가장 조선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가장 세련된 그릇이었다. 그는 사라져가는 강원도의 말들을 문학이라는 영구적인 기록매체에 각인시킴으로써, 방언의 미학적 가치를 증명해 낸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백석의 시와 평안도 방언의 숭고미: 모국어의 확장과 감각의 제국
남쪽에 김유정이 있었다면, 북쪽에는 백석이 있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 백석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방언을 가장 예술적으로, 그리고 가장 감각적으로 활용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집 사슴(1936)은 평안도 방언의 보물창고이자, 방언이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높이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백석에게 방언은 리얼리즘의 도구가 아니라, 잃어버린 고향과 공동체의 원형을 복원하는 주술적 언어였다.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이나 국수, 고야(古夜) 등을 읽다 보면, 우리는 낯설고 기이한 단어들과 마주하게 된다. 징게국(새우국), 갓(붕어), 댕기(머리), 자개미(겨드랑이), 조아질(자갈), 즈므니(천, 1000) 같은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평안도 지방에서 쓰이던 토속어이거나, 중세 국어의 원형을 간직한 고어들이다. 백석은 이 단어들에 주석을 달지 않고 시의 문맥 속에 과감하게 배치했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이 낯선 단어들에 당황하지만, 곧 그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리듬과 토속적인 이미지에 매료된다.
백석은 방언을 통해 미각, 후각, 촉각의 세계를 열어젖혔다. 표준어 국수가 주는 이미지가 희고 매끄러운 면발이라면, 백석이 노래한 평안도 방언 국수는 꿩고기 육수의 구수한 냄새와 추운 겨울방 윗목의 서늘함, 그리고 가족들이 둘러앉은 훈훈한 온기를 모두 포함하는 공감각적인 단어다. 그는 방언 어휘 하나하나에 고향의 풍경과 정서를 응축시켰다. 특히 그가 사용한 가즈랑집, 돝(돼지), 볏가리 같은 단어들은 현대 도시 문명에 의해 밀려난 전근대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을 시 속에 재건축하는 재료가 되었다.
백석의 시에서 방언은 단순히 지역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표준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민족의 심층 무의식, 즉 샤머니즘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매개체다. 그는 털썩, 웅성웅성 같은 의성어와 의태어조차도 평안도 식의 거칠고 투박한 소리로 변주하여 사용했다. 이를 통해 백석은 한국어를 표준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해방시키고, 모국어의 영역을 북방의 광활한 대륙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의 시는 방언이 촌스러운 사투리가 아니라, 가장 세련되고 모더니즘적인 시적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증거다. 백석 덕분에 평안도 방언은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나 한국 문학사라는 영원한 안식처를 얻게 되었다.

사라지는 말들을 위한 변명과 미래의 언어 유산
지금까지 우리는 방언 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는 뫼와 가람 같은 고어의 흔적을 추적하고, 김유정과 백석의 문학을 통해 그 말들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되살아났는지 살펴보았다. 방언은 단순히 표준어의 대립항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어라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이자,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온 언어의 나이테다. 표준어가 효율성과 소통을 위해 가지치기해버린 수많은 어휘와 문법들이 방언이라는 껍질 속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방언 어휘들이 소멸하고 있다. 노년층 화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무수와 정지와 아자비는 영원히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언어의 소멸은 곧 세계의 소멸이다. 뫼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산을 신성하게 여겼던 고대인의 마음도 사라지고, 가람이라는 단어가 잊히면 강을 생명의 젖줄로 여겼던 조상들의 사유도 희미해진다. 생물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함을 유지하듯, 언어 다양성은 문화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다. 표준어 하나만 남은 세상은 단일 경작지처럼 병충해에 취약하고 빈곤한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방언 속에 남아 있는 고어들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과거를 위한 회고적인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말의 어휘를 풍성하게 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미래의 언어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우리는 뫼를 다시 산으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뫼가 품고 있던 그 그윽한 정서와 울림만은 기억해야 한다. 김유정과 백석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 낡은 말들을 닦고 조여서 새로운 이야기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이 언어를 학습하는 시대에 방언 데이터는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표준어 데이터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한국인의 미묘한 감정과 정서, 그리고 역사적 깊이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나 아쉽다. 하지만 그 사라짐을 기록하고 기억할 때,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씨앗이 된다. 방언은 우리 말의 고향이다. 그 고향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뫼와 가람이 비록 지도 위에서는 사라졌을지라도, 우리의 언어적 유전자 속에서는 영원히 흐르고 솟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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