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이 가른 두 언어
영서는 ‘서울말화’, 영동은 성조·-나/-노가 살아있는 동해안권
‘-드래요’ 허상을 바로잡고 지리언어학 분석·현장 용례·미디어 고증·보존 제언으로 강원 방언의 실체를 복원하다

1. 서론: 강원도 사투리는 하나가 아니다 - 백두대간이 설계한 언어의 국경선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접하는 ‘강원도 사투리’는 하나의 거대한 오해 덩어리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나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강원도 사람들은 모두 순박한 표정으로 “그랬드래요~”라며 말꼬리를 늘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대중의 인식 속에서 강원도는 ‘감자바위’라는 별명처럼 단일한 정서와 단일한 언어를 가진 뭉뚱그려진 공간이다. 하지만 언어학적 렌즈, 특히 지리언어학(Geolinguistics)의 지도를 펼쳐보면 강원도는 결코 하나의 언어권이 아니다. 오히려 한반도 남한 내에서 가장 극적이고 선명한 ‘언어적 단층(Linguistic Fault)’이 존재하는 분열의 땅이다.
그 분열의 주범이자 설계자는 바로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The Taebaek Mountains)이다. 평균 해발 고도 1,000미터가 넘는 이 거대한 장벽은 강원도를 동쪽의 ‘영동(嶺東)’과 서쪽의 ‘영서(嶺西)’로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터널도 고속도로도 없던 전근대 시기에, 이 산맥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문명과 문화를 가르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산 너머 동쪽(강릉, 속초, 삼척)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남쪽의 경상도와 교류하는 것이 산을 넘어 한양(서울)으로 가는 것보다 수월했다. 반면 산 서쪽(춘천, 원주, 철원) 사람들은 북한강과 남한강 물길을 따라 경기도 및 서울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이러한 지리적 결정론(Geographical Determinism)은 언어에 지울 수 없는 문신을 새겼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모두 ‘강원특별자치도’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있지만, 언어학적으로 영서 지방은 ‘경기 방언권(중부 방언)’에, 영동 지방은 ‘경상 방언권(동남 방언)’의 아류 혹은 독자적인 ‘영동 방언권’에 속한다. 즉, 춘천 사람과 강릉 사람의 대화는 서울 사람과 부산 사람의 대화만큼이나 이질적인 문법과 억양 체계를 가지고 있다. 본고는 태백산맥이라는 자연 장벽이 어떻게 행정 구역을 무력화시키고 두 개의 언어 우주를 창조했는지 규명하고, 미디어가 만들어낸 ‘-드래요’라는 기괴한 혼종(Hybrid)이 어떻게 강원도 방언의 실체를 왜곡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영서 방언의 특징: 서울의 그림자와 강물의 언어
태백산맥의 서쪽, 영서(嶺西) 지방은 춘천, 원주, 홍천, 철원, 화천 등을 포함한다. 이 지역의 언어적 정체성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서울말의 확장판’ 혹은 ‘경기 방언의 변이형’이다. 지도를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영서 지방의 주요 하천인 북한강과 남한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경기도를 관통해 한양(서울)으로 들어간다. 전근대 사회에서 강물은 고속도로였다. 뗏목을 타고 서울 마포나루까지 나무와 특산물을 실어 나르던 영서 사람들은 서울의 말씨를 실시간으로 수입하고 동화되었다.
음운론적으로 영서 방언은 서울말과 거의 차이가 없다. 가장 큰 특징은 ‘성조(Pitch Accent)의 부재’다. 말의 높낮이로 단어의 뜻을 구별하는 기능이 없으며, 억양(Intonation)이 평탄하고 부드럽다. 서울 사람이 춘천이나 원주에 가서 대화를 나누면, 몇몇 독특한 어휘를 제외하고는 이것이 사투리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영서 지방이 언어학적으로 ‘중부 방언권’의 핵심 멤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울말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영서 방언만의 미세한 차이는 주로 종결어미와 모음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첫째, ‘-래요’가 아닌 ‘-구요/고요’의 변이형이다. 영서 지방, 특히 춘천권에서는 "그랬구요"를 "그랬구요" 혹은 "그랬고요" 등으로 발음하는데, 이때 억양이 서울보다 약간 더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둘째, 모음 ‘ㅗ’와 ‘ㅜ’의 교체다. "삼촌"을 "삼춘"으로, "돈"을 "둔"으로 발음하는 현상이 잦다. 이는 경기도 방언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영서 지방에서 더욱 고착화되어 있다.
셋째, 질문형 어미 ‘-나/가’의 사용이다. 서울말의 "했니/했어?" 대신 "했나?"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인접한 충청도나 강원도 내륙의 영향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영서 방언에서 가장 오해받는 종결어미가 바로 ‘-래요’다. 많은 사람이 춘천에 가서 "닭갈비 먹으러 왔드래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춘천 토박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영서 방언의 고유한 종결어미는 오히려 ‘-(이)래요’보다는 ‘-잖소’, ‘-지 않소’ 혹은 평범한 ‘-요’에 가깝다. 영서 방언은 서울 표준어의 강력한 자장(Magnetic Field) 안에 있으면서도, 산악 지형 특유의 투박함이 한 스푼 섞인, ‘거친 서울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곳은 언어적으로 강원도라기보다는 ‘확장된 경기도(Greater Gyeonggi)’에 가깝다.
강원도 춘천 카페에서 주문할 때에 내가 아이스 라떼 달라고 하자, 직원이 “네, 아이스 라떼 맞구요, 사이즈는 라지로 하실 거예요?”라고 되물었다. 내가 “네, 라지요.” 하니까 “시럽은 추가 안 하구요?” 라고 말했었다. 서울말과 거의 동일한 억양과 어미였고, 전반적으로 표준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사투리’ 의식이 약했다. 미세하게 변이된 것은 "맞구요", "안 하구요"처럼 -고요/-구요의 유지·빈도가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보다 말끝이 살짝 더 늘어진다. 이 때를 생각하면, 영서(춘천) 말투가 미디어가 상상한 ‘-드래요’와는 무관하며, 서울 표준어와 거의 동일한 체계 위에서 어미 선택과 말끝 늘임의 미세한 차이만 남아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3. 영동 방언의 특징: 파도의 억양과 성조(Tone)의 생존
태백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가면, 전혀 다른 언어의 세계가 펼쳐진다. 강릉, 동해, 삼척, 속초, 고성, 양양을 아우르는 영동(嶺東) 지방이다. 차를 타고 대관령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라디오 주파수가 바뀌듯 사람들의 말투가 급변한다. 영동 방언의 가장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특징은 바로 ‘성조(Pitch Accent)’의 존재다.
서울말이나 영서 방언에는 없는 말의 높낮이(High/Low)가 영동 방언에는 살아 있다. 이는 영동 지방이 역사적으로 경상도(신라)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지리적으로 동해안을 따라 경상북도(울진, 영덕)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은 영동 방언을 경상도 방언과 묶어 ‘유성조 방언권(Tonal Dialect Area)’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1) 성조의 기능: 강릉 말에서 ‘말(Horse)’은 높게(High), ‘말(Language)’은 낮게(Low) 발음된다. 이는 경상도 방언의 성조 체계와 매우 흡사하다. 문맥 없이 단어만 들어도 뜻을 구별할 수 있는 이 기능은 태백산맥이 막아준 덕분에 서울말의 ‘평탄화(Leveling)’ 압력을 견뎌내고 보존된 것이다.
2) 종결어미 ‘-나/노’의 사용: 영동 방언, 특히 삼척 지역으로 내려가면 경상도 방언의 특징인 의문형 어미 ‘-나(판정 의문)’와 ‘-노(설명 의문)’가 나타난다. 강릉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의문형 어미인 ‘-나’와 ‘-니’가 섞여 쓰이는데, 억양 자체가 경상도처럼 뚝뚝 끊어지고 강렬하다.
3) 어휘의 독자성: 영동 방언에는 바다와 관련된 독특한 어휘가 많다. ‘오징어’를 ‘오징어’라 하지 않고 말리는 상태에 따라 세분화하거나, 명태의 이름을 수십 가지로 부르는 것은 해양 문화의 영향이다. 또한 **‘-지 마이(하지 마라)’, ‘-우야(형님)’** 등 경상도 사투리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어휘들이 풍부하다.
특히 강릉 사투리의 백미는 ‘-나이’ 혹은 ‘-내’ 어미다. "밥 먹었나이?", "어디 가나이?"와 같이 쓰이는 이 어미는 고대 국어의 존대법 흔적으로 추정되며, 매우 고풍스럽고 격조 있는 느낌을 준다. 영서 사람들이 서울말을 지향하며 자신의 사투리를 감추려 했다면, 영동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서울말과는 뿌리부터 다른 ‘독립된 언어’라는 무의식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영동 방언은 강원도 사투리라기보다는, 함경도와 경상도를 잇는 동해안 언어 벨트의 허리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방언이다.
4. ‘-드래요’의 해부: 미디어가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언어
이제 강원도 방언에 대한 가장 거대한 오해, ‘-드래요’를 해부할 차례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전 국민은 강원도 사투리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거기 뱀이 있드래요~", "감자가 맛있드래요~"를 떠올린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래요’라는 종결어미는 문법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쓰이는 오용된 형태다.
언어학적으로 ‘-드래요’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구성: ‘-더라(회상/인용)’ + ‘-요(존대 보조사)’
원래 의미: "그렇다고 하더라요(카더라)" 혹은 "그렇더라요(회상)"
즉, ‘-드래요’는 자신의 생각이나 현재의 상태를 진술하는 평서문 어미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거나(더), 남의 말을 인용하여 전달할 때(대) 쓰이는 어미가 변형된 것이다.
올바른 용례 (인용): "옆집 순이가 시집간대요(간다더래요)." -> 이것이 강원도 억양으로 발화되면서 "간다드래요"로 들릴 수는 있다.
잘못된 용례 (평서): "이 감자가 참 맛있드래요." (X) -> "이 감자가 참 맛있잖소", "맛있으요", "맛있지 않나" 등이 맞다.
미디어는 복잡한 방언의 문법을 단순화하고 희화화하기 위해, 특정 어미를 문맥에 상관없이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들은 강원도의 순박하고 토속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실제 화자들은 쓰지 않는 "왔드래요", "갔드래요", "먹었드래요"를 창조해 냈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적 오리엔탈리즘’이다. 타자의 문화를 단순화하여 타자화(Othering)시키는 폭력인 것이다.
실제 강원도 토박이, 특히 영동 지방 사람들은 이 ‘-드래요’를 들으면 질색한다. 그들이 쓰는 실제 종결어미는 훨씬 다양하고 입체적이다.
강릉: "밥 먹었우야?", "그랬지 마이."
정선/영월: "그랬래요.", "그랬잖소."
춘천: "그랬다니깐요.", "그랬구요."
‘-드래요’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 그것은 서울 사람들이 상상 속에 그려놓은 ‘시골 강원도’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립된 **프랑켄슈타인 언어**다. 이 어미의 남발은 강원도 방언이 가진 진짜 매력, 즉 영서의 깔끔함과 영동의 역동성을 모두 지워버리고, 강원도를 그저 ‘우스꽝스러운 시골’로 박제해 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5. 사회언어학적 고찰: 관광지화와 방언의 상품화, 그리고 소멸
태백산맥이 막아주던 시절, 영동과 영서는 각자의 언어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했다. 하지만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 그리고 최근 KTX 강릉선의 개통은 이 견고했던 지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 이제 서울에서 강릉까지는 2시간이면 닿는다. 물리적 거리의 단축은 필연적으로 심리적, 언어적 거리의 소멸을 가져온다.
현재 강원도, 특히 관광지로 급부상한 강릉, 속초, 양양의 언어 환경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젊은 층은 빠르게 표준어에 동화되고 있으며, 영동 방언 특유의 성조는 60대 이상의 노년층에서만 관찰되는 ‘소멸 위기’ 단계에 진입했다. 더 심각한 것은 ‘방언의 상품화’다. 관광지 식당이나 카페에서는 외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억지스러운 ‘-드래요’ 문구를 간판에 내건다. "맛있드래요 버거", "오시드래요 카페" 등.
이것은 ‘자발적 언어 왜곡’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언어 정체성을 버리고, 타자가 규정한 가짜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행위다. 사회언어학적으로 볼 때 이는 방언이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전시물’로 전락하는 과정이다. 진짜 사투리는 시장통 할머니들의 억센 억양 속에 살아 있는데, 관광객들은 간판에 적힌 가짜 사투리를 소비하고 떠난다. 이 괴리 속에서 강원도의 진짜 언어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영서 지방의 언어 소멸 속도는 더 빠르다. 춘천과 원주는 이미 수도권 전철이 닿는 사실상의 수도권이다. 이곳에서 방언을 찾는 것은 서울 강남에서 방언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졌다. 영서 방언은 ‘서울말화’ 되어 사라지고, 영동 방언은 ‘관광 상품화’ 되어 왜곡되는 이중고. 이것이 태백산맥이 뚫린 이후 강원도 언어가 마주한 서글픈 현실이다.
6. 결론: 산맥은 길을 막지만, 언어는 길을 낸다
지금까지 우리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와 영동으로 갈라진 강원도 방언의 이질성과, 미디어가 만들어낸 ‘-드래요’의 허상을 살펴보았다. 강원도는 단순히 감자가 많이 나는 도가 아니다. 그곳은 한반도의 중부(서울/경기)와 남부(경상)의 언어적 특징이 거대한 산맥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공존하는 ‘한국 방언의 축소판’이다.
영서 방언의 부드러움은 강물을 닮았고, 영동 방언의 거친 성조는 파도를 닮았다. 이 두 언어는 서로 다르기에 아름답다. 만약 태백산맥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동 지방의 그 독특하고 역동적인 성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의 장벽은 교류를 막는 불편한 존재였지만, 역설적으로 언어의 다양성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파제였다.
이제 우리는 ‘-드래요’라는 가짜 안경을 벗고, 강원도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강릉 중앙시장에서 들리는 상인들의 높은 억양(성조)이 왜 경상도와 닮았는지, 춘천의 말투가 왜 서울말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사라져가는 지역 문화를 존중하는 첫걸음이다.
방언은 그 땅의 지문(Fingerprint)이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듯, 강원도의 진짜 사투리가 사라지면 우리는 태백산맥이 품고 있던 수천 년의 이야기를 잃게 된다. 터널을 뚫어 차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언어의 풍경은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다. 강원도에는 ‘-드래요’는 없지만, 훨씬 더 다채롭고 살아 숨 쉬는 언어의 숲이 있다. 그 숲이 완전히 베어지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그 소리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7. 제언: 정확한 기록과 미디어 리터러시의 필요성
마지막으로, 강원도 방언의 보존과 올바른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제언을 덧붙인다.
첫째, 미디어 창작자들의 고증 책임이다. 드라마나 영화 작가들은 ‘강원도 사투리 = -드래요’라는 게으른 공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별(영동/영서) 차이를 인지하고, 전문적인 자문을 통해 디테일이 살아있는 방언을 구사해야 한다. 이는 작품의 리얼리티를 높일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올바른 언어 인식을 심어주는 공적 기능이다.
둘째, 지역 사회의 언어 자존감 회복이다. 강원도민 스스로가 표준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언이 가진 역사적, 언어학적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관공서나 지자체는 관광 홍보물에 왜곡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강릉말’, ‘춘천말’ 등 세분화된 방언 사전을 편찬하거나 구술 채록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대중의 미디어 리터러시 함양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지방의 모습이 편집되고 왜곡된 이미지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왜 -드래요 안 쓰세요?"라고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들어주는 태도, 그것이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다. 태백산맥은 이제 물리적으로는 넘기 쉬워졌지만, 마음속의 편견의 산맥은 여전히 높다. 그 산을 넘는 유일한 장비는 ‘관심’과 ‘이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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