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위기 방언의 어원 및 문법 연구

경상도 할머니의 마는 왜 공격적으로 들릴까 담화적 기능 분석과 침묵의 경제학

info-7713 2025. 12. 12. 15:33

경상도 할머니의 ‘마’, 왜 공격적으로 들릴까?

담화적 기능과 문화적 맥락을 통해 풀어보는 츤데레 화법의 인문학적 해석

 

 


단음절의 미학 혹은 오해의 씨앗, 경상도 방언 마의 정체


한국어의 방언 지도를 펼쳐보면 각 지역마다 그 지역 사람들의 기질과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어휘들이 존재한다. 전라도의 거시기가 모호함 속에 끈끈한 유대감을 담아내는 관계의 언어라면, 충청도의 그려나 개 혀는 완곡함 속에 뼈 있는 진심을 숨기는 여백의 언어다. 그리고 여기, 경상도, 그중에서도 부산과 대구를 아우르는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단음절의 단어가 있다. 바로 마다. 경상도 토박이 할머니가 시장통에서, 혹은 밥상머리에서 무심하게 내뱉는 마!라는 소리는 타 지역 사람들에게, 특히 서울 표준어 화자들에게는 종종 당혹감이나 심지어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짧고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파열음, 그리고 뒤이어지는 침묵이나 명령조의 문장은 마치 싸움을 걸거나 화를 내는 듯한 공격적인 신호로 오인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언어의 표면적인 소리값(Sound value)에만 집중한 결과다.

언어학적 관점, 특히 실제 대화의 맥락을 연구하는 담화 분석(Discourse Analysis)의 틀로 들여다보면, 마는 단순한 감탄사나 비속어가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문법적 절차를 생략하고 대화의 국면을 전환하거나, 상대방과의 심리적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거나, 혹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를 단 한 글자로 압축해 내는 고도로 효율적인 담화 표지(Discourse Marker)다. 경상도 할머니의 마 속에는 그만해라라는 제지, 내 말 좀 들어봐라라는 주의 환기, 밥은 먹었냐라는 걱정,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본론만 말해라라는 실용주의가 모두 녹아 있다. 즉, 마는 경상도식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가 빚어낸 소통의 마법 키이자, 겉은 투박하지만 속은 깊은 정을 담고 있는 츤데레 화법의 결정체다.

본고는 경상도 방언의 마가 왜 타 지역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들리는지 그 음운론적 원인을 분석하고, 실제 대화 속에서 이 단어가 수행하는 다양한 담화적 기능들을 해부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 짧은 단음절어가 어떻게 경상도 사람들의 급한 성격과 깊은 속정을 동시에 대변하는 문화적 기호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방언의 화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인문학적으로 고찰해 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 풀이가 아니라, 소리 뒤에 숨겨진 침묵과 마음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공격성의 기원과 하마와 임마의 융합

마가 공격적으로 들리는 일차적인 이유는 그 소리의 물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음성학적으로 마는 양순 비음 [m]으로 시작하지만, 경상도 방언 특유의 강한 성조(Pitch Accent)와 결합할 때 그 성질이 변한다. 경상도 화자들은 이 단어를 발음할 때 성대의 긴장을 동반하며 짧고 강하게 끊어 치는 경향이 있다. 표준어 화자가 저기...나 있잖아...와 같이 부드럽게 대화를 시작하거나 말을 이어가는 것과 달리, 경상도 화자의 마!는 고저(High Pitch)에서 시작하여 급격히 하강하거나 짧게 종결된다. 이러한 운율적 특징은 청자에게 일종의 청각적 타격감을 주며, 이것이 명령이나 질책과 같은 공격적인 뉘앙스로 해석되는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 마는 도대체 어디서 온 말일까. 어원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의 유력한 가설이 존재하며, 현대의 마는 이 두 가지가 융합된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첫째는 대명사 임마(이놈아)의 축약형이다. 임마는 이 놈아가 줄어든 말로, 주로 손아랫사람이나 매우 친한 친구 사이에서 상대를 부를 때 쓰인다. 임마가 마로 줄어들면서 대명사의 기능은 약화되고, 상대를 부르거나 주의를 끄는 감탄사적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둘째는 부사 하마의 변형이다. 중세 국어에서 하마는 이미, 벌써, 곧 등의 의미를 지닌 부사였다. 경상도 방언에서 하마는 이제 그만, 이미 충분히와 같은 맥락에서 쓰이다가, 앞의 하가 탈락하고 마만 남아 어떤 행동의 중단이나 완료를 촉구하는 담화 표지로 굳어졌다는 설이다.

실제로 경상도 할머니들의 용례를 보면 이 두 가지 어원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손자를 부를 때 마, 일로 와바라라고 할 때는 임마의 흔적이, 잔소리를 그만하라고 할 때 마, 치아라(그만둬라)라고 할 때는 하마의 흔적이 엿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어원이 합쳐지면서 마는 인칭 대명사의 구체성과 부사의 시간성을 모두 초월하여, 상황 전체를 통제하고 조율하는 메타 언어적 기능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짧은 소리 하나에 너라는 지칭과 그만이라는 명령, 그리고 내 말을 들어라라는 의도가 모두 압축되어 있으니, 그 에너지의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타 지역 사람들이 느끼는 공격성은 바로 이 고밀도로 압축된 의미가 터져 나올 때 발생하는 언어적 충격파인 셈이다.

 

 

 

 

 



멈춤, 시작, 그리고 강조의 만능 버튼


언어학에서 담화 표지란 문장의 명제적 의미(내용)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대화의 흐름을 조절하거나 화자의 태도를 나타내는 요소를 말한다. 영어의 Well, You know나 표준어의 뭐, 저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경상도 방언의 마는 한국어 방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다기능적인 담화 표지 중 하나다. 그 쓰임새를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제 전환 및 주의 환기의 기능이다. 대화 도중 화자가 마!라고 외치면, 기존의 대화 흐름은 즉시 중단되고 청자의 주의는 화자에게 집중된다. 이는 영어의 Hey!나 Look!보다 훨씬 권위적이고 강력하다. 할머니가 TV를 보다가 마, 뉴스 좀 틀어바라라고 할 때, 마는 앞선 상황(TV 시청)을 종료시키고 새로운 상황(뉴스 시청)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 이때의 마는 공격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주의 집중 전략이다. 잡다한 서론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진입하겠다는 경상도 특유의 급한 성격과 실용주의가 반영된 것이다.

둘째, 제지 및 종결의 기능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하마(이제 그만)의 의미가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용법이다. 상대방이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 경상도 사람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 마! 혹은 마, 됐다!라고 일갈한다. 이것은 논쟁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상황을 내가 정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타 지역 사람들은 이를 무시나 거절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내부자들에게 이것은 불필요한 갈등 확대를 막고 관계를 보존하려는 갈등 해결의 방식이기도 하다. 더 싸우면 감정만 상하니 여기서 멈추자는 신호를 마라는 한 글자로 보내는 것이다.

셋째, 강조 및 감탄의 기능이다. 이 기능이 마의 가장 반전 매력이다. 긍정적인 상황이나 놀라운 사실을 접했을 때, 마는 최상급의 부사로 변신한다. 마, 쥑인다!(와, 정말 끝내준다!)라거나 마, 억수로 맛있다!라고 할 때, 마는 뒤에 오는 형용사의 강도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킨다. 이때의 마는 상대방에게 나의 감정에 동의해 달라는 강력한 호소이자, 함께 감탄하자는 공감의 요청이다. 할머니가 손자가 사 온 선물을 보고 마, 뭘 이런 걸 다 사 왔노!라고 할 때, 그 속에는 타박이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고마움이 응축되어 있다. 실제로 친구와 친구 할머니댁에 여행 갔을 때 본 적이 있다. 할머니께서 종종 김치를 나눠주시곤 했다. 어느 날,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자주 안 주셔도 돼요"라고 말했더니, 할머니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짧게, "마." 하고는 돌아서셨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꾸지람인가 싶어 긴장했지만, 그 뒤로도 계속 김치를 챙겨주시고, 가끔은 반찬도 함께 놓고 가셨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마’는 “됐고, 넌 그냥 잘 먹어라”라는 의미의 따뜻한 배려였다는 것을. 겉으로는 퉁명스럽지만, 그 짧은 한 음절에 마음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넷째, 친밀감 확인 및 허물없음의 표시 기능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사이에서는 절대로 마를 쓸 수 없다. 반대로 말해, 마를 쓴다는 것은 너와 나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아주 가까운 우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마, 살아있나?라고 묻는 것은 생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소원함을 한방에 날려버리고 예전의 친밀한 관계를 즉각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경상도 사람에게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아, 이 사람이 나를 내집단(In-group)으로 받아들였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무뚝뚝함(Mutdukduk)의 가면을 쓴 정(Jeong)의 경제학

경상도 방언, 특히 마의 화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상도 지역의 독특한 정서적 문화인 무뚝뚝함과 정의 역학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경상도,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 감정을 미주알고주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하거나 체신머리없는 짓으로 간주되었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기에는 너무나 쑥스럽고 간지러운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마는 구체적인 감정 언어를 대신하는 훌륭한 대체재였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상 위에 고기 반찬을 툭 밀어 놓으며 마, 무라(자, 먹어라)라고 말하는 아버지, 걱정된다는 말 대신 밤늦게 들어온 딸에게 마, 일찍 일찍 댕기라라고 소리치는 어머니. 이들의 마 속에는 언어화되지 못한, 아니 굳이 언어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깊은 사랑과 관심이 녹아 있다. 이것은 침묵의 경제학이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심이라고 믿는 문화에서, 언어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수록 진정성을 얻는다. 마는 그 최소한의 언어적 신호다.

또한 이것은 고맥락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말하지 않아도 문맥과 눈빛, 그리고 공유된 기억을 통해 의사가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마 한 글자로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타 지역 사람들, 특히 모든 것을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해야 하는 저맥락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불친절하고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정보가 생략되어 있고, 해석의 책임을 청자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왜 화를 내세요?"라고 물으면 경상도 할머니는 "내가 언제 화를 냈노, 마, 그냥 하는 소리지"라고 답할 것이다. 그들에게 마는 화가 아니라 일상적인 호흡이며, 상대방을 내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투박한 초대장이다.

특히 할머니들의 마는 더욱 복합적이다. 그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다.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내고 가정을 지켜야 했던 그들에게 부드럽고 상냥한 서울말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시장바닥에서, 밭고랑에서 거친 삶을 헤쳐나가는 동안 그들의 언어는 단단해지고 짧아졌다. 그 마 소리에는 고단했던 삶의 무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겠다는 강인한 생명력이 배어 있다. 따라서 그 소리가 공격적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그들이 세상을 향해 세워야 했던 방어기제가 언어에 남긴 흔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딱딱한 껍질을 깨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물렁한 속살이 숨어 있다.

 

 

 

 

 


번역되지 않는 마음, 마의 인문학적 가치

 

경상도 할머니의 마

 


지금까지 경상도 할머니의 마가 왜 공격적으로 들리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다양한 담화적 기능과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마는 표준어의 어떤 단어로도 완벽하게 번역될 수 없다. 자, 그만, 야, 매우, 정말 등 수많은 단어들이 후보가 될 수 있지만, 마가 발화되는 그 순간의 공기, 화자의 눈빛, 그리고 그 짧은 소리의 파장 안에 담긴 뉘앙스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것은 언어의 한계이자 동시에 방언의 위대함이다. 방언은 그 지역의 삶과 역사가 만들어낸 고유의 정서적 무늬를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친절함과 명확함을 강요한다. 서비스업의 매뉴얼화된 언어, 감정을 숨기고 예의를 차리는 비즈니스 화법이 표준이 된 세상에서, 경상도 할머니의 마는 시대착오적인 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투박한 단어는 가치를 가진다. 가식과 위선이 판치는 세상에서, 앞뒤 재지 않고 툭 던지는 마 한마디는 얼마나 솔직하고 인간적인가. 그것은 계산되지 않은 날것의 마음이며,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격식의 벽을 허무는 파격이다.

소멸해가는 방언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은 단순히 어휘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라는 소리 뒤에 숨어 있는, 표현 서툴지만 속정 깊었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이제 누군가 당신에게 마!라고 외친다면, 쫄지 말고 그 소리의 여운을 느껴보라. 그 짧은 외침 속에 담긴 것은 공격이 아니라, 당신과 진짜 대화를 하고 싶다는, 껍데기 벗고 마음으로 만나자는 투박한 프러포즈일지도 모른다. 언어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경상도의 마는 바로 그 진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