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방언에 침투한 식민의 기억 일본어 잔재의 어원학적 분석과 역사적 지층
함경도 방언 속 일본어 잔재
병참기지화·공업화와 항만·철도·광산 접촉사, 생활어·노동어 변용과 성조 친연성, 혼종 문법, 문화어 정화 이후 잔존·소멸 위기, 탈북민 구술 아카이빙의 당위 총체 분석
병참기지화와 공업화의 그늘 함경도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언어 접촉의 역사
한반도의 언어 지도를 펼쳐놓고 볼 때 함경도 방언은 가장 북쪽에 위치한 변방의 언어이자, 역사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외래어 접촉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의 언어적 잔재라고 하면 서울을 위시한 중부 지방이나 개항장이었던 부산, 인천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언어지리학적 관점과 역사적 맥락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함경도 지역이야말로 일본어 어휘가 가장 깊숙이, 그리고 가장 특수한 형태로 침투하여 토착 방언과 혼종을 일으킨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일제가 추진했던 병참기지화 정책과 만주사변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함경도, 특히 함경북도 지역은 농경 중심이었던 남부 지방과는 전혀 다른 지정학적 운명을 겪었다. 일제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서 함경도를 주목했고, 청진, 나진, 웅기(선봉) 등의 항구를 개방하고 대규모 공업 지대를 조성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지배를 넘어, 근대적 기술 문명과 그에 수반된 언어 체계가 함경도라는 척박한 토양 위에 급격하게 이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함경도에 유입된 일본어는 단순한 생활 일본어에 그치지 않았다. 철도, 광산, 항만, 화학 공장 등 중화학 공업과 관련된 전문 용어들이 일본인 기술자들과 관리자들을 통해 대거 유입되었다. 남부 지방의 농민들이 농업 용어나 행정 용어 수준에서 일본어를 접했다면, 함경도의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기계와 도구, 공정을 지칭하는 일본어 명사들을 습득해야 했다. 함경선 철도가 부설되고 무산의 철광석이 청진항으로 실려 나가는 과정에서, 철도 레일, 광산의 채굴 장비, 항만의 하역 작업과 관련된 일본어 어휘들은 함경도 방언의 억양과 결합하여 독특한 피진(Pidgin) 혹은 크레올(Creole)에 가까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는 언어 접촉 이론에서 말하는 위층 언어(Superstratum)로서의 일본어가 기층 언어(Substratum)인 함경도 방언을 압도하거나 대체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생존과 노동의 현장에서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차용되고 변형되어 고착화된 사례로 볼 수 있다.
더욱이 함경도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 특히 동해를 마주한 니가타나 마이즈루 등과의 해상 교류가 빈번했다. 육로로는 멀지만 해로로는 가까운 이 지리적 특성은 인적 물적 교류를 가속화했다. 1930년대 이후 함경도의 도시화율은 급격히 상승했고,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도시로 몰려든 유이민들은 일본어가 섞인 노동 현장의 언어를 새로운 모국어처럼 받아들였다. 이때 형성된 혼종어들은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이 들어서고 문화어 운동이라는 강력한 언어 순화 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함경도 사람들의 입말을 지배했다. 따라서 함경도 방언 속에 남은 일본어 잔재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한 어원 찾기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 공업화라는 근대의 기형적인 발전 과정이 민초들의 언어생활에 어떤 상처와 흔적을 남겼는지를 규명하는 사회언어학적 고고학이자, 잊혀진 북방의 근대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남한의 표준어가 겪은 일본어 순화 과정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며, 북한 체제 내에서 혹은 탈북민들의 기억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이 어휘들은 분단과 식민이라는 이중의 비극을 증언하는 언어적 사료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생활어와 노동어에 박제된 일본어 어휘의 변용 양상과 음운론적 친연성
함경도 방언, 그중에서도 육진 방언을 포함한 함경북도 방언에서 발견되는 일본어 잔재는 그 어휘의 범주와 음운론적 변용 양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보인다. 우선 어휘의 범주를 살펴보면, 식생활이나 의생활 같은 일상적인 어휘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업, 건설, 기계 관련 어휘의 비중이 타 방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예를 들어 남한에서는 이미 사라지거나 순화된 공구 이름이나 기계 부품의 명칭들이 함경도 출신 고령층의 구술이나 탈북민들의 언어 속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우가 많다. 도라이바(드라이버), 뺀찌(펜치), 스패나(스패너) 같은 공구류는 물론이고, 공구리(콘크리트), 가다(거푸집), 노가다(노동)와 같은 건설 현장 용어들이 함경도 특유의 거센 억양과 결합하여 마치 고유어처럼 쓰였다. 이는 함경도가 일제 강점기 한반도 최대의 중화학 공업 기지였음을 방증하는 언어적 지문이다. 남한의 산업화 과정에서도 이러한 일본어 유래 현장 용어가 쓰였지만, 함경도의 경우 그 정착의 시기가 더 빠르고 그 강도가 더 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음운론적으로 볼 때 함경도 방언과 일본어 사이에는 묘한 친연성이 존재한다. 함경도 방언은 한국어의 여러 방언 중에서도 성조(Pitch Accent)가 가장 확실하게 남아 있는 유성조 방언이다. 단어의 높낮이에 따라 의미가 분화되는 함경도 방언의 특징은, 역시 고저 악센트를 가진 일본어의 음운 구조와 맞물려 일본어 차용어의 수용을 용이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어 단어가 함경도 방언으로 들어올 때, 함경도 화자들은 자신들의 성조 체계에 맞춰 일본어의 악센트를 재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일본어의 평판형이나 기복형 악센트가 함경도 방언의 고조(High)나 저조(Low) 패턴에 대응되어 정착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어 특유의 장단음 구별이나 유성음과 무성음의 대립은 약화되거나 한국어식으로 변형되었지만, 억양의 리듬감만큼은 묘하게 유지되거나 오히려 강화되어 함경도 사투리 특유의 억센 느낌을 배가시켰다.
친척 집에 놀러갔을때 “전구 갔다가 다마 큰 거로 바꿔라”라고 말한걸 들은 적이 있다. “다마가 전구죠?”라고 확인하고 철물점에 갔다. 철물점에서 “여긴 다마라고 해야 알아듣는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집수리라는 일상적 맥락에서 ‘전구’보다 ‘다마’를 우선 호출하고, 상점의 상호작용 역시 같은 어휘를 강화한다. 일본어 유래 명사(다마)에 한국어 조사와 종결을 결합해 아무런 이질감 없이 발화한다. 억양은 지역 성조 규칙을 따르며, 단어 선택은 세대별 언어 기억과 상업적 실천이 결합된 결과로 고착된다. 결국 ‘다마’는 과거 기술 문물의 어휘가 생활경제의 관성 속에서 재생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미시적 증거다.
구체적인 생활 어휘의 예로는 다마(전구), 벤또(도시락), 즈봉(바지), 죠끼(조끼) 등이 있다. 물론 이러한 단어들은 남한에서도 널리 쓰였던 것들이지만, 함경도 지역에서는 그 대체가 훨씬 더디게 일어났다.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 구조와 경제난은 새로운 물품이나 개념의 유입을 막았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구식 물건들과 그 명칭이 그대로 존속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트럭을 뜻하는 도라꾸나 오토바이를 뜻하는 오토바이 같은 단어들은 러시아어 차용어인 뜨락또르(트랙터) 등과 혼재되어 사용되면서 함경도만의 독특한 외래어 층위를 형성했다. 또한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의 품종 명칭에서도 국광이나 홍옥 같은 일본식 명칭이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문법적 통합 양상이다. 함경도 방언 화자들은 일본어 명사에 한국어 조사를 붙여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어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에 함경도식 어미를 결합하여 새로운 혼종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시마이(끝냄)라는 일본어 명사에 하오, 슴둥 같은 함경도 종결 어미를 붙여 시마이하오(끝냅시다)라고 말하거나, 단도리(채비)를 단도리메우다(채비를 갖추다)와 같이 복합 동사화하여 사용하는 식이다. 이는 두 언어 체계가 충돌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코드 스위칭(Code-switching) 현상을 넘어, 외래어가 토착 방언의 문법 체계 안으로 완전히 포섭되어 융합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 융합은 당시 함경도 사람들이 일본어라는 권력의 언어를 단순히 앵무새처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적 자원(Linguistic resource)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체적으로 변용했음을 시사한다. 그들에게 일본어 잔재는 청산해야 할 적폐이기 이전에,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공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했던 생존의 도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어휘들에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단함과, 낯선 근대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려 했던 치열한 적응의 역사가 배어 있다.
언어 정화 정책의 이면과 소멸해가는 식민 방언의 기록학적 가치
해방 이후, 남과 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제 잔재 청산 작업에 돌입했다. 남한이 국어 순화 운동을 통해 일본어 투 용어를 점진적으로 고유어로 대체해 나갔다면, 북한은 1960년대 중반부터 문화어 운동을 전개하며 훨씬 더 급진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언어 정화에 나섰다.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문화어가 표준으로 제정되었고, 한자어와 일본어, 그리고 각 지방의 방언은 봉건 잔재이자 혁명에 방해되는 요소로 규정되어 배격당했다. 이론적으로라면 이러한 강력한 국가 통제 하에서 함경도 방언 속의 일본어 잔재는 진작에 소멸했어야 했다. 그러나 언어의 생명력은 권력의 의지보다 질기다. 공식적인 매체나 교육 현장에서는 일본어 잔재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함경도 사람들의 사적인 대화, 특히 노동 현장과 장마당이라는 비공식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그 잔재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오히려 북한의 폐쇄성과 경제적 낙후성은 역설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언어를 보존하는 타임캡슐 역할을 했다. 새로운 기술이나 문물이 유입되지 않고 1930~40년대의 설비와 인프라를 그대로 사용하는 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설비를 지칭하는 일본어 용어들도 굳이 바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고난의 행군 이후 국가 배급망이 붕괴되고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개인 간의 거래나 밀수 과정에서 일본 제품이나 중고 물품들이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잊혔던 일본어 어휘들이 다시 소환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이는 언어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적 필요성과 생활의 실재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함경도 방언 속의 일본어 잔재는 진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어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던 일제 강점기 세대와 해방 직후 세대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으며, 북한 내부의 세대교체와 남한 문화(한류)의 유입으로 인해 젊은 층의 언어가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에 정착한 3만 5천여 명의 탈북민들 또한 남한 사회 적응을 위해 필사적으로 고향의 말을 지우고 표준어를 습득하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함경도 방언 특유의 어휘와 억양, 그리고 그 속에 박혀 있던 일본어의 흔적들은 부끄러운 것, 감추어야 할 것으로 취급되어 망각의 저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가 함경도 방언 속 일본어 잔재를 연구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일제 강점기를 그리워하거나 그 잔재를 옹호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아픈 역사의 증거(Evidence)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증언하는 가장 정직한 목격자다. 함경도 방언 속에 남은 일본어 어휘들은 일제가 한반도 북부를 어떻게 수탈했는지, 그 과정에서 민초들이 어떤 방식으로 근대를 경험하고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미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료다. 공구리라는 단어 하나에는 댐 건설에 동원되었던 강제 징용 노동자의 땀방울이 맺혀 있고, 벤또라는 단어에는 배고픈 시절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의 허기가 서려 있다. 이 단어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탈북민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그 어원과 용례를 꼼꼼히 분석하여 아카이빙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방언학적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을 넘어, 분단으로 인해 반쪽짜리가 되어버린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온전하게 복원하는 길이며, 언어 속에 새겨진 식민의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하는 인문학적 애도 작업이다. 소멸해가는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를 쓰고 뱉으며 시대를 견뎌냈던 사람들의 기억이다. 그 기억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언어학적, 역사적 책무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