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방언 ‘거시기’의 화용론적 기능과 고맥락 문화: 언어의 빈칸을 채우는 침묵과 유대의 미학
‘거시기’의 화용론
고맥락 공동체가 눈빛·억양·손짓으로 빈칸을 메우는 만능 대용어
품사 경계를 넘는 지시·완곡·관계 확인 장치이자 유대와 배제의 이중 기능, 디지털 시대 쇠퇴 속 보존의 가치
‘거시기’는 게으른 언어가 아니라 가장 진화된 텔레파시다
한국 영화 <황산벌>에는 전라도 사투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장면이 등장한다. 백제 계백 장군이 병사들에게 “거시기 해불자!”라고 외치자, 신라군 첩자들이 도대체 저 ‘거시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지 못해 혼란에 빠지는 장면이다. 여기서 ‘거시기’는 돌격하라는 뜻일 수도, 죽기를 각오하라는 뜻일 수도, 혹은 밥을 먹자는 뜻일 수도 있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볼 때, 전라도 방언의 대명사 ‘거시기’는 명확한 정보가 결여된, 화자의 게으름이 빚어낸 불친절한 언어처럼 보인다. 단어 하나로 모든 상황을 퉁치려는 태도는 언어의 본질인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학적, 화용론(Pragmatics)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거시기’는 결코 게으르거나 열등한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화자와 청자가 완벽하게 정서적, 상황적 맥락을 공유하고 있을 때만 작동할 수 있는 ‘고도로 압축된 소통의 정점’이다. 이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모든 변수를 대체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Wildcard)’이며, 인간의 소통으로 치면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뛰어넘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시도다. ‘거시기’가 발화되는 순간, 언어의 책임은 말하는 사람(화자)에게서 듣는 사람(청자)에게로 넘어간다. 청자가 그 빈칸을 정확히 채워 넣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이 독특한 언어 게임은 전라도라는 지역 사회가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의 밀도를 증명한다.
현대 사회는 명확성을 숭배한다. 계약서의 조항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의미를 규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맥락(Low Context)’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전라도의 ‘거시기’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하며, 모호함 속에 진심을 담고, 생략 속에 신뢰를 심는다. 본고는 전라도 방언의 ‘거시기’를 단순한 사투리나 유머의 소재가 아닌,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고맥락 문화 이론과 지시대명사(Deixis)의 화용론적 기능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이 단어가 가진 인문학적 가치와 소통의 철학을 심층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이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난해한 이 단어에 대한 변호이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공감의 언어’에 대한 탐구이다.
품사의 경계를 허무는 만능 대용어(Pro-form)의 메커니즘
표준어 사전에서 ‘거시기’는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정의된다. 어원적으로는 ‘그것(That thing)’을 의미하는 ‘것’에 접미사가 붙어 파생된 것으로 보이나, 전라도 방언에서의 ‘거시기’는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훨씬 뛰어넘는 문법적 파격을 보여준다. 언어학적으로 ‘거시기’는 명사, 대명사, 수사, 부사, 감탄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동사와 형용사의 자리까지 넘나드는 ‘범주 초월적 대용어(Universal Pro-form)’의 성격을 띤다.
통사론(Syntax)적으로 분석해 보자.
명사적 용법: “아따, 저 거시기 좀 가져와라.” (지시 대상: 물건, 사람 등)
부사적 용법: “오늘 날씨가 참 거시기하네.” (상태: 묘한, 흐린, 꿀꿀한 등)
동사적 용법: “그 일을 확 거시기해부러라.” (행위: 처리하다, 죽이다, 끝내다, 훔치다 등)
감탄사적 용법: “아, 거시기, 그 뭐냐...” (담화 표지: Filler word)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동사적 활용’이다. “거시기하다”라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사랑하다’가 될 수도 있고 ‘살해하다’가 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긍정과 극단적인 부정이 단 하나의 기표(Signifier)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을 극대화한 형태다. 소쉬르가 말한 기표(소리)와 기의(의미)의 결합이 사회적 약속에 의해 고정된다면, 전라도의 ‘거시기’는 그 약속을 상황(Context)에 따라 매번 새롭게 갱신하는 ‘유동적 기호’다.
또한 ‘거시기’는 금기어(Taboo)를 대체하는 ‘완곡어법(Euphemism)’의 기능을 수행한다. 성(性)적인 표현, 배설, 죽음 등 직접적으로 말하기 껄끄러운 단어들을 ‘거시기’라는 중립적인 단어로 포장함으로써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고 대화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그 사람이 어제 거시기했다며?”라고 말할 때, 화자와 청자는 그것이 ‘사망했다’ 혹은 ‘이혼했다’와 같은 부정적인 사건임을 직감하지만, 굳이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음으로써 대상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이처럼 품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의미를 무한히 확장하는 ‘거시기’의 메커니즘은, 전라도 방언이 가진 문법적 유연성을 보여준다. 이는 어휘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어휘 하나에 수백 가지 뉘앙스를 담아내려는 고도의 언어적 경제성(Economy)이 작동한 결과다. ‘거시기’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텅 빈 그릇’이지만, 그 안에 담기는 내용물은 세상의 모든 단어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 이론의 적용: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전라도의 토양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그의 저서 『문화의 차원(Beyond Culture)』에서 세계의 문화를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와 ‘저맥락 문화(Low Context Culture)’로 구분했다.
저맥락 문화(미국, 독일 등): 의사소통의 정보가 대부분 언어 메시지 자체에 명시적으로 담겨 있다. 직설적이고 논리적이며, 말하지 않은 것은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고맥락 문화(한국, 일본, 중동 등): 정보의 상당 부분이 맥락(상황, 관계, 비언어적 요소)에 내재되어 있고, 언어로 표현되는 부분은 적다. 모호함, 침묵, 눈치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전라도, 특히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전라도 사회는 한국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초(超)고맥락 문화’의 특성을 보인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함께 자라고 늙어가는 공동체,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이웃 관계 속에서 구구절절한 설명은 오히려 군더더기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거시기’는 꽃을 피운다.
“어이, 거시기한테 가서 거시기 좀 거시기하고 오라 해라.”
이 문장이 전라도 마을 회관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 화자: 마을 이장
2) 청자: 청년회장
3) 상황: 내일 마을 잔치가 있음, 어제 돼지를 잡기로 논의했음.
이 맥락(Context)이 공유된 상태에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해독된다.
“어이, 철수(도축업자)한테 가서 돼지(제수용품) 좀 손질(준비)하고 오라 해라.”
저맥락 문화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정보 누락이자 소통의 오류이지만, 고맥락 문화인 전라도에서는 이것이 ‘효율’이자 ‘미덕’이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입 아프게 나열하는 것은 상대방의 정보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다. “척 하면 삼천리”라는 말처럼,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야 하는 것이 전라도의 소통 문법이다. 여기서 ‘거시기’는 단순한 대명사가 아니라, 공유된 기억(Shared Memory)과 배경지식(Background Knowledge)을 소환하는 ‘하이퍼링크’ 버튼과 같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거시기라고 말하는 행위)는 단순하지만, 그로 인해 불러와지는 데이터의 양은 방대하다.
따라서 ‘거시기’의 화용론적 기능은 정보 전달보다는 ‘맥락의 확인’에 있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언어적으로 확인함으로써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홀이 말한 대로, 고맥락 문화에서 소통의 책임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에게 있다. 전라도에서 ‘눈치 없는 놈’은 단순히 센스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는, 즉 ‘거시기’를 해독하지 못하는 사회적 부적응자로 간주된다.
지시대명사(Deixis)와 비언어적 기호의 결합: 눈빛으로 완성되는 문법

화용론에서 지시대명사(Deixis)는 화자, 청자, 시간, 장소 등 발화 현장의 상황에 따라 가리키는 대상이 달라지는 표현을 말한다. ‘거시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불확정적인 지시성을 띤다. 그렇다면 이 불확실한 단어가 어떻게 구체적인 지시 기능을 수행할까? 비밀은 바로 비언어적 기호(Non-verbal cues)와의 결합에 있다.
전라도 방언에서 ‘거시기’는 결코 텍스트 단독으로 쓰이지 않는다. 반드시 화자의 눈빛(Eye contact), 턱짓, 손짓, 억양(Intonation), 표정과 함께 발화된다.
시선: 화자가 ‘거시기’라고 말하며 마당 구석의 빗자루를 힐끔 쳐다본다. -> “빗자루 좀 가져와.”
억양: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아따, 오늘 참 거시기~ 허요잉.”이라고 말한다. -> (상황에 따라) 날씨가 덥다, 혹은 기분이 멜랑꼴리하다.
손짓: 손으로 무언가 자르는 시늉을 하며 “확 거시기해부러.” -> 잘라라, 혹은 끊어라.
이때 비언어적 기호는 ‘거시기’라는 텅 빈 기표에 구체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주사기와 같다. 텍스트 언어가 10%의 정보를 담당한다면, 나머지 90%는 몸짓과 상황이 담당한다. 이는 찰스 샌더스 퍼스(C.S. Peirce)의 기호학에서 말하는 ‘지표(Index)’의 기능과 유사하다. ‘거시기’라는 소리 자체가 대상을 상징(Symbol)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태도와 물리적 맥락이 대상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거시기’가 화자의 심리적 상태까지 지시한다는 것이다. 말문이 막혔을 때 사용하는 ‘거시기’는 현재 화자가 당황했거나, 기억 인출에 실패했음을 알리는 신호다. 하지만 전라도 화법에서는 이 ‘막힘’조차도 용인된다. 청자는 화자가 ‘거시기’를 연발하며 기억을 더듬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리거나 혹은 “아, 그 김 영감 말인가?”라며 조력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 자체가 하나의 놀이이자 소통의 과정이 된다.
디지털 텍스트 위주의 소통(카카오톡, 문자)에서 ‘거시기’의 힘이 급격히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언어적 단서가 제거된 상태에서 ‘거시기’는 그저 해석 불가능한 암호일 뿐이다. 따라서 ‘거시기’는 대면(Face-to-face) 소통이 전제되어야만 생명력을 얻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인간적인 대명사다. 그것은 AI나 번역기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육체성과 현장성에 뿌리를 둔 언어다.
유대(Intimacy)와 배제(Exclusion)의 이중주
언어는 사회적 울타리를 만든다. 전라도 방언의 ‘거시기’는 내부인에게는 끈끈한 유대감(Intimacy)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이지만, 외부인에게는 진입 장벽을 높이는 배제(Exclusion)의 기제로 작용한다.
먼저 유대의 기능을 보자. 화자와 청자가 ‘거시기’만으로 대화가 통했을 때 느끼는 쾌감은 상당하다. “우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라는 ‘우리가(We-ness)’의 확인이다. 이는 한국의 ‘정(情)’ 문화와 깊이 연결된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것은 정이 없거나 서운한 일로 간주된다. 반면, 두루뭉술하게 ‘거시기’로 넘기는 것은 상대를 믿는다는 증거이자,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날카로운 지점을 피하려는 ‘공손성 전략(Politeness Strategy)’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치부를 지적해야 할 때 “자네, 요새 좀 거시기하다며?”라고 돌려 말하는 것은 상대의 체면을 보호하려는 배려다.
우리 할머니께서 전라도 목포 사람이었는데, '거시기'를 자주 사용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들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거시기'라고 표현해도 알아들었다. 한 번은 할머니께서 “우리 그때 먹던 그 거시기로 가자잉.” 이라고 하셨는데, 어디를 가자고 말씀하시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이 경우 우리의 단골 메뉴(공유 기억)를 ‘거시기’로 호출한다. 구체 명칭을 생략해도 상호 맥락이 즉시 복원되며, “우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라는 유대 확인 신호가 된다. 모호함이 곧 친밀성의 증거로 기능한다.
반면, 이 맥락을 공유하지 못하는 외부인(타 지역 사람)에게 ‘거시기’는 철저한 소외감을 안겨준다. <황산벌>의 신라군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 이는 의도적인 배제일 수도 있고,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소외일 수도 있다. 전라도 사람끼리 ‘거시기’로 신나게 떠들다가 서울 사람이 오면 갑자기 표준어로 구체적인 설명을 시작하는 장면은, 언어 코드가 전환(Code-switching)되면서 심리적 거리감이 재설정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또한 ‘거시기’는 책임 회피의 도구로도 쓰인다.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네가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준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시대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민초들의 언어적 처세술이기도 했다. 확실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서 의사를 전달하는 고도의 정치적 화법인 셈이다. 이처럼 ‘거시기’는 친밀함의 징표이면서 동시에 방어의 방패가 되는 양면성을 지닌다.
디지털 시대, ‘거시기’의 소멸과 그 쓸모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라도 방언 ‘거시기’를 에드워드 홀의 고맥락 문화 이론과 화용론적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거시기’는 단순한 사투리나 습관어가 아니다. 그것은 화자와 청자의 관계, 상황, 비언어적 맥락, 그리고 공동체의 역사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낸 ‘가장 한국적인 소통의 결정체’다. 그것은 빈칸으로 비어 있음으로써 오히려 가장 꽉 찬 의미를 전달하는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거시기’의 위상은 위태롭다. 농경 사회가 해체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웃 간의 맥락 공유는 불가능해졌다. 층간 소음으로 다투는 아파트 이웃에게 “거시기 좀 합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매뉴얼화되고, 기록되고, 증명되어야 하는 저맥락 사회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에서 의미가 불분명한 ‘거시기’는 오류(Error)이거나 노이즈(Noise)로 취급된다. 젊은 세대에게 ‘거시기’는 촌스러운 옛날 말이거나,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 정도로 소비될 뿐, 실제 소통의 도구로서의 기능은 상실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거시기’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적 소통의 온기’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따지는 피로한 사회 속에서, 눈빛 하나로 마음을 읽어주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는 ‘거시기’의 화법은 일종의 구원이 될 수 있다. AI(인공지능)가 아무리 발달해도 ‘거시기’의 뉘앙스를 완벽하게 번역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AI에게는 데이터는 있지만, ‘공유된 삶의 기억’과 ‘눈치’가 없기 때문이다.
‘거시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 하나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헤아려주던 고맥락 공동체의 정서적 유대가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언젠가 이 모호하고 불친절한 단어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너무나 명확해서 오히려 차갑고 외로운 세상에서, “아따, 거시기 하요잉?”이라는 말 한마디가 건네던 그 따뜻한 위로와 연결감을 말이다. 전라도의 ‘거시기’는 우리가 지켜야 할, 언어 그 이상의 문화적 유산이다.
[참고 문헌 및 주석]
Hall, E. T. (1976). Beyond Culture. Anchor Books. (고맥락/저맥락 문화 이론의 창시)
Levinson, S. C. (1983). Pragmat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지시대명사와 화용론적 함축에 대한 기초 이론)
이기갑 (2000). 「전라남도의 언어와 문화」. 『국어학』. (전라도 방언의 사회언어학적 특징 연구)
최석재 (2012). 「대용어 ‘거시기’의 담화 기능 연구」. 『한국어화용론』. (거시기의 실제 담화 분석 데이터 참조)
박영순 (2004). 『한국어 화용론』. 도서출판 박이정. (한국어의 간접 화행과 완곡어법 분석)